일본군장교 아들과 절교한 독립운동가 유림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1946년 신탁통치 반대시위 당시 임시정부 청사이자 김구의 숙소였던 경교장에 몰린 군중들의 모습 (LIFE Alfred, Elsenstaedt 촬영) |
ⓒ 서울시 |
우리 독립운동 진영은 대단히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 공화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보황주의, 복벽주의 등 무지개 색깔에 비유될 정도였다. 정세의 변화 그리고 이합집산을 통해 크게 공화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으로 나뉘고, 대부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되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스트는 소수였지만 정예분자들이었다. 일본제국주의 본질인 강압적인 권력의 지배체제를 반대하면서, 자주·상호부조·자유연합사회건설을 이상으로 하는 아나키즘을 가치와 목표로 내세웠다.
이회영·신채호·유자명·이을규 등 아나키즘 이론가이며 폭렬투쟁을 전개한 해동파들은 독립운동사의 샛별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들 외에도 결코 잊혀서는 안 될 투사들이 더 있었다. 여기서 소개하는 유림(柳林)도 그 중의 한 분이다.
유림(1894~1961)은 경북 안동에서 아버지 유교흠과 어머니 의성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단주(旦洲) 이명은 유화영이다. 아버지는 학행을 겸비한 은사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13살에 고성 이씨와 혼인했다. 1910년 17살일 때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충군애국'이란 혈서를 쓰고 항일운동에 나섰다. 청년들을 모아 부흥회를 조직했다가 일경에 구금되었다.
3.1혁명이 일어나자 임동주재소를 박살내고 만주로 탈출하여 이상룡·김동삼 등 선배들이 조직한 서로군정서에 참여, 두 차례나 비밀 사명을 띄고 입국했다. 1921년 베이징으로 옮겨 신채호·김창숙 등과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아나키즘에 심취하였다. 신채호·김창숙의 대의정신과 결기를 오롯이 이어 받았다.
학구열이 높았던 그는 성도대학(成都大學)에 들어가 1925년 졸업하면서 아나키즘 이론가가 되고 독립운동의 실천자가 되어 만주에서 국내공작에 착수했다. 국내 아나키즘 조직과 연계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대전형무소에서 5년 복역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 단체들과 항일운동을 벌이다 49살이던 1942년 1만리 길을 걸어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 이듬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피선되고, 임정의 임시헌장 개초안 작성위원, 1944년에는 임정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 건국강령기초위원 및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다 일제 패망으로 환국하였다.
환국 후 통일정부수립에 헌신하며 비상국민의회부의장을 지내고 독립노동당을 창당, 당수에 선임되었으며 <노동신문>을 창간하여 평생 추구해온 이념선양에 힘썼다. 정부수립을 앞두고 통일독립운동가중앙협의회를 결성, 대표간사에 선임되어 활동 중 6.25전쟁이 일어나고 부산에 피난, 야당 및 재야세력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의 독주와 헌정유린에 저항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타도되고 김창숙·장건상·조경한·정화암 등과 조국의 완전한 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혁신동지총연맹을 결성, 5인집단지도체제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제2대 총선거, 1958년 제4대 총선에 나섰으나 "공산당 사촌"이란 역선전에 말려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했다.
독립운동가 특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출신들의 생활은 해방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권력의 탄압이 멈추지 않았고 질병과 빈곤이 따랐다. 유림 역시 다르지 않았다. 1961년 4월 1일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살던 서울 제기동에서 68살에 심장마비로 고난의 생애를 접을 때 까지 빈곤이 떠나지 않았다.
임종 시에 가정부가 쌀을 마련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생활이 극빈의 처지였다. 부인과 아들이 있었지만 혼자 살게 된 아픈 사연이 있다.
유림은 45년 12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후 61년 4월 서거할 때까지 외아들 원식(原植)을 만나주지 않았다. 유원식이 일본군 고급장교를 지냈다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당사자야 생각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군 고급장교라면 그 직위의 속성으로 미루어 만주·중국에서 우리 독립운동자들을 색출, 고문하던 일제 침략의 첨병 노릇까지도 해내던 위치였음은 사실이다. 아나키즘의 이론가이자 독립노동당 핵심간부였던 전 경북대교수 하기락씨(74·현 계명대 강사)는 6.25 사변 당시 유씨 부자간의 비극적 만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6.25 사변 초기 포항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치열하기로 유명합니다. 당시 포항지구전투에선 누구라도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해야 될 정도였지요. 그때 연대장으로서 이 전투에 참여하게 된 아들 유원식은 마지막 한 번만이라도 부친을 만나 보려고 대구로 왔어요. 마침 유림 선생은 우리집 사랑방에 기거하고 계실 때입니다. 외아들이 찾아왔다는 얘길 들은 유림선생은 등을 바깥으로 향하곤 아들을 쳐다보지 않습디다. 끝내 유원식은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울며 그냥 돌아가고 말았지요."<단주 유림, 자료집(1)>)
단주 선생은 일본군장교가 된 아들뿐만 아니라 부인과도 멀리하였다.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이유였다.
더구나 유림은 아들뿐 아니라 부인 이난희도 만나주질 않았다. 남편이 혼자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동안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일제의 앞잡이로 만들었다는 책망에서였다. 46년 부인이 죽었을 때 유림은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를 가까이 모시던 측근자가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셨어요"하고 알렸다. 그러나 유림은 들은 척도 안하고 눈 한번 깜짝하지 않으며 신문을 읽어내려 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살기 위한 유림이가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때문에 살고 있는 유림이다. 내가 가정에 얽매인 유림이냐?"(앞의 책)
단주 유림 선생이 그나마 적절한 시점에 서거함으로써 50여 일 후 아들 유원식이 참여한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를 겪지 않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노산 이은상이 작사한 <유림선생 추모가>이다.
1. 조국이 어둠 속에 잠길 제 영화도 행복도
2. 정기를 잃어버린 세대여 겨레의 가는 길
모두 던져 버리고 비바람 이역만리 쇠사슬
누가 바로 잡을고 하나가 백 인듯이 아깝고
속에서도 오직 송백인양 맵고 차더니
아쉬운데 큰나무 우지끈 부러졌다니
피로써 찾고 피로써 세운 나라 님과 우리
피로써 찾고 되로써 세운 나라 마지막 순간
할 일이 산같이 쌓였는데 오 봄은 오고
까지 외치던독립전선 오 봄은 오고
님은가셨네 동지들 여기 목놓아 우네
님은가셨네 동지들 여기 다시 일어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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