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내가 UN 사무총장이다"…재판부도 속이려 한 그 남자

윤지원 2024. 2.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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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로이터

유엔 사무총장을 사칭해 피해자들의 돈을 가로채는 ‘비즈니스 스캠’(Business Scam) 조직의 일원인 70대 남성에게 징역 3년이 선고됐다. 이 남성은 이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미 연방수사국(FBI) 전 국장 등 국제 거물들을 사칭하는 범죄로 처벌받은 적 있는 상습 사기범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김길호 판사는 지난해 11월 16일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72)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A씨는 2019년 ‘비즈니스 스캠’ 조직원 B로부터 사기 범행에 동참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 비즈니스 스캠은 해외에서 다른 사람의 SNS(소셜미디어) 계정을 해킹하거나 가짜 인적 사항으로 SNS 계정을 만든 다음 이를 이용해 국내 거주자에 무작위로 연락해 친분을 쌓은 뒤 허위로 사업 비용을 뜯어내는 조직화된 국제 범죄다. 조직 구성원들은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고 자신이 맡은 역할과 연관이 없는 조직원은 인식하지 못하는 점조직처럼 운영된다.

A씨가 부여받은 역할은 조직원들이 피해자들로부터 가로챈 돈을 송금받을 계좌를 마련하고, 이 돈을 추적이 어려운 해외계좌 등으로 빼돌리는 ‘자금관리책’이었다.

B씨는 같은 해 3월 경 카카오톡을 통해 알게 된 C씨를 피해자들을 유인하는 유인책으로 포섭했다. B씨는 C씨에게 “나는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다. 당신을 유엔의 평화대사로 임명하겠다”고 말하며 위조된 유엔 사무총장 명의의 평화대사 임명장을 전송했다. 그런 뒤 C씨로 하여금 피해자들에게 ‘나는 유엔 평화대사로서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와 친분이 있다. 당신도 유엔 평화대사로 임명해줄 테니 사무총장 방한 경비 1000만원을 보내달라’고 거짓말을 하게 했다.

이렇게 C씨가 뜯어낸 피해자의 돈은 A씨 형수 명의의 농협은행 계좌→ D씨 계좌→E씨 계좌로 연달아 송금되는 ‘돈세탁’ 과정을 거친 뒤 인출돼 최종적으로 A씨가 수령했다. 이들이 총 7명의 피해자들로부터 가로 챈 돈은 약 1억7300만원에 달했다.

14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2회 세계지식포럼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이 강연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A씨의 범행은 이내 덜미가 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A씨가 재판 과정에서 꺼내 든 비화(祕話)는 ‘사실 이 일은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개인 자금을 국내에 유치하기 위해 관련 인허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또 다른 국제거물 연루설이었다. A씨의 변호인은 “A씨가 2014년 세네갈 방문 당시 세네갈의 아마두 케인 전 재무부 장관을 소개받았고, 그로부터 ‘UBS 스위스 은행 휴면계정에 8억 5000만 달러가 예치되어 있는데, 이를 합법화하는 것을 도와주면 한국에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며 “또 2017년 5월 폼페이오 당시 CIA 국장을 소개받은 뒤, 아마두 케인의 8억 5000만 달러와 폼페이오의 개인 자금 5억 5000만 달러를 합법화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일 뿐 피해자들 돈을 가로챌 의사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씨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A씨가 주장하는 사업 자금의 규모나, 공동사업자 등이 그 자체로 상식과 경험칙에 현저하게 반해 믿기 어렵다”며 “A씨가 사업 근거로 제시한 자금 증명서 등은 폼페이오의 천문학적 자금 원천이 담긴 허황된 내용이고, 문서 형식 자체도 조악해서 도저히 진정하게 성립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봤다. 또 “폼페이오가 보낸 메시지라고 주장해 제출한 자료도 그 내용이나 영어 구사 수준에 비추어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2017년 9월 11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판단에는 A씨가 이미 ▶2017년 테렌스 제이미 노셔니스 전 주한미군 제7공군 사령관과 존 브레넌 당시 CIA 국장을 사칭하는 범죄를 방조한 죄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2019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IMF 총재,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을 사칭하는 범죄를 방조해 징역 4개월, 집행유예 6개월의 처벌을 받은 전력이 참작됐다. 재판부는 “유사한 범행 전력이 있는 점 등을 종합해 보면, A씨가 비즈니스 스캠 조직원들과 공모해 피해자들을 속이고 돈을 가로챈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비즈니스 스캠은 일종의 조직범죄로 최근 번져 나가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며 “A씨가 상습법인데도 3년밖에 처벌받지 않은 것을 보면 사기죄 형량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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