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도 두려워한 보은집회, 서울역 회군이 떠오른 이유

이영천 2024. 2. 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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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여명 몰렸지만, 조정은 해산시키라 닦달... 어윤중의 허탈함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수만 백성이 엄동설한 차디찬 길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3일을 빌었다. 어려운 청탁이나 물질적 보상을 바란 게 아니다. 그저 동학 교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거였다.

돌아가 생업에 힘쓰면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노라는 왕의 말이니, 이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허망하게 속아 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왕은 한술 더 떠 동학도를 잡아들여 집단 소요를 엄단하라는 명을 내린다.

전라감사와 포도대장이 전주집회와 광화문 상소를 막아내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된다. 각 고을 수령에게 동학을 단속하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는 엄명이 내린다. 서울에 온 농민은 동학도로 지목받았으니 돌아가면 관아에 잡혀갈 것이다. 이제 돌아갈 길마저 막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 장안리 들판 들판과 속리산 자락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장안리.
ⓒ 이영천
 
길 잃은 농민들이 법소(法所)가 있는 보은 장안면 장안리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수운 최제우 조난일인 3월 10일(음)에 이르러 이미 수만 명이다. 각지에서 모여드는 숫자나 열기가 삼례집회의 몇 배는 되었다.

삼례에서 경험으로 먹을 것과 옷을 챙겨 장기농성 태세를 준비한다. 하지만 법소는 이런 집회가 달갑지 않다. 분노한 수만 군중이 발산해 내는 혁명적 기운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은집회

배고픈 곤궁함이 흐르던 그 봄, 수만 발걸음이 보은으로 향한다. 집회가 열린 장안리는 제법 번화한 마을로, 속리산 부근에 은신처를 둔 해월 최시형의 활동공간이었다.
 
▲ 장안리 서쪽 보은읍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장안리로 드는 서쪽 들판.
ⓒ 이영천
 
걸음이 교통의 전부이던 당시, 은둔과 포교를 번갈아 펼치기에 매우 적당한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청주와 상주 중간지점으로 유사시 산으로 피신하기 수월하고, 평상시 인근 대도시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입지 여건이었다. 수만 농민이 모여들던 시점, 해월과 법소 지도자들은 청산현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수운 최제우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3월 10일 수운선생 기진식(忌辰式)을 청산 김연국 집에서 봉행한 후 선생이 보은 장내면으로 돌아오니 이미 각지 도인 수만 명이 모여서 다시 상소를 도모하려 꾀하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려 각 지역, 접마다 기(旗)를 세워 표식으로 삼고 넓은 벌판에 질서정연하게 자리하였는데 그 앉은 형식이 매우 잘 정돈되고 규격화하여 한 번에 보아도 능히 그 수효를 헤아릴 만치 되었으며.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62에서 의역하여 인용)
 
자발적으로 모인 수만 군중이 각각 자리를 정하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유지한다. 배곯는 보릿고개 팍팍한 계절, 장안리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싸울 준비를 하려는 듯 각 포와 접으로 나뉘어 돌로 성을 쌓는다. 형형색색의 깃발을 내건다. 가장 큰 깃발엔 척양척왜(斥洋斥倭)가 내걸린다. 중간 크기엔 참여지역이 표시된다. 작은 깃발엔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제폭구민(除暴救民)이 내 걸린다.
 
▲ 마을 유래 보은집회 당시 동학교도 수만 명이 앞 냇가 평지에서 20여 일 농성했다는 내용이 있다.
ⓒ 이영천
 
이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몰려들어 2만을 넘어서고 있다. 먹는 것과 잠자는 것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가장 큰 문제였다. 어떤 방책으로 하루하루를 넘길지 법소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청나라 군사를?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이 부랴부랴 강경책을 들고 나온다. 어윤중을 양호 선무사로 홍계훈을 진압군으로 임명, 현지 파견대를 구성한다. 보은 출신 어윤중은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다. 무력으로 탄압, 해산시키기보다 군중의 동정을 살피고 그들의 주장과 뜻이 무엇이며 그 위험성 여부를 신중하게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때 '동학당 대회설'이 경향에 널리 퍼져 마침내 임금 귀에도 미치자, 조정에서 선유사 어윤중(魚允中)을 명하여 보은으로 내려오게 하고 충청 병사 홍계훈(洪啓薰)으로 일천 병력을 거느리고 보은에 진주하게 했다. (앞의 책. p163에서 의역하여 인용)
 
고종을 비롯한 조정은 보은에 모인 동학도 해산에 골몰한다. 1893년 3월 25일 실록은, 삼남에 모인 동학도들이 서울로 침범할 만일의 사태를 두려워하여 청나라 군사를 끌어 들이자는 고종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심순택, 조병세, 정범조의 반대로 흐지부지되었지만, 왕이란 사람의 인식 수준이 대체로 이러했다. 청일전쟁의 불씨가 고종의 머릿속에 이미 잉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보은으로 내려간 어윤중 직책을 두고 논쟁하는 한심한 광경도 연출한다.
집회 10일째 되는 날 들끓는 염원에 비해 하품 나오는 통문이 법소에 나붙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축멸왜이(逐滅倭夷), 권귀진멸(權貴盡滅) 깃발이 올라와 긴장감이 감돈다. 이때 보은 관아에서 법소 통문에 호응이라도 하듯, 충효를 강조하는 통고문을 보내온다. 이런 와중에 군중이 계속 불어나 5만여 명에 이른다.
 
▲ 마을 자랑비 2대 교주 해월에 의해 동학의 대도소가 있던 마을이라는 글이 보인다.
ⓒ 이영천
 
정부 타도를 외치는 수만 기층 민중의 열기와는 달리, 법소는 조정의 실력행사에 어설픈 타협으로 일관한다. 어윤중이 '임금께 절하고 칙유를 들어라' 는 말에 법소 주요 인사들이 주저 없이 따른다. 또한 공맹의 가르침을 말하자 동학은 이미 유불선(儒佛仙)을 따르므로 유교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어윤중은 군중의 요구사항을 적어오라 하여,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그 스승을 신원하는 일과 지목하여 수탈하는 행위를 없애 달라는 것 말고 다른 뜻은 없다 하였다. …(중략)…
가만히 도인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손에 날카로운 무기가 없고 그 태도 또한 매우 정중하여 조금도 난폭한 기색이 없는지라 어윤중은 그 사실을 들어 낱낱이 임금께 보고하였다. (앞의 책. p163에서 의역하여 인용)
 
허무한 해산
어윤중이 순진했을까. 조정은 어서 빨리 해산시키라 닦달한다. 왕후 치마폭에 놀아나는 신하들 누구 하나 나서려 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어윤중에게 돌리며 강제 해산만을 읊어 댄다.
 
▲ 장안리 동쪽 삼가천 변 장안리 동쪽. 이곳에서 보은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 이영천
 
어윤중은 허탈했다. 이 많은 사람을 1천여 군사로 강제 해산시키려 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수령 이하 관리들도 매관매직으로 관직에 오른 작자들이라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했기에, 청주 영장 백남석과 보은군수를 대동하고 판에 박힌 칙교(勅敎)를 낭독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해산시키라는 왕명을 전하며 압력을 행사한다.
 
조정에서'잘 타일러 해산시켜라'는 말뿐으로 …(중략)… 어윤중은 보은군수 이규백(李圭白)을 시켜 조정의 뜻을 가지고 군중 속으로 들어가 그 유지를 낭독하게 하였다. (앞의 책. p163에서 의역하여 인용)
 
어윤중의 관리로서 진지한 태도가 통했는지,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던 법소 지도자들이 먼저 동요한다. 이때부터 5만이나 되는 백성의 뜻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이에 앞장선 이가 광화문에서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던 서병학이다.

짧은 시간에 변절한 것인지, 원래 품성이 그러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황스러운 장면임엔 분명하다. 서병학이 어떻게 집회를 무력화했는지 그 과정을 보면 변절의 깊이와 속도에 아연해 진다.

서병학이 보은에 모인 사람들은 각 고을 수령의 수탈에 지친 이들로 절반은 동학도가 아니라고 어윤중에게 변명한다. 같은 시각 전라도 원평에서 열리고 있는 집회에 조정에서 의심하는 모든 내용을 뒤집어씌운다.

원평에 모인 무리는 이곳과 다르다며 서장옥, 손화중, 김덕명, 김기범(개남), 김봉집(金鳳集)이 주모자라 고변한다. 김봉집은 전봉준의 가명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변신도 대단한 변신이다. 복합상소 때 무력으로 조정을 도모하자고 주장하던 사람이, 뜻을 같이한 교도를 3개월 만에 조정에 고자질하는 모습이다.
 
집회를 소집한 자가 서병학이란 점, 또 격문을 돌리고 호소문을 계시한 자도 다 성명이 밝혀졌습니다. (앞의 책. p168에서 인용)
  
▲ 장안리 동쪽 삼가천을 따라 길이 있고, 보은집회가 열린 평지에는 풍성한 곡식이 무르익고 있다.
ⓒ 이영천
 
그리고 어윤중에게 3일의 기한을 얻어, 해월을 비롯한 법소 지도자들이 야반도주하듯 잠행(潛行)을 결행하고 만다.
 
도인들이 듣기를 마친 후 임금 은혜에 절하고 머무른 지 3일 만에 해월의 명에 따라 해산하여 귀가하였다. (앞의 책. p164에서 인용)
 
어윤중은 보은에 모인 동학당이 해산하였다고 3월 30일 임금에게 보고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일어선 백성의 열망이 외면당하는 순간이다. 해월은 교단 보호라는 길을 끝내 벗어나지 않는다. 계엄령이라는 정보에 지레 겁먹고 해산해버린 1980년의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와 달리 전라도 중심의 남접은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보리 싹처럼 움트기 시작하는 혁명의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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