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허망한 희망뿐이라고 느껴진다면, 이 시집을 추천합니다
[김은진 기자]
▲ 정지윤 시인은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2014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로 등단했다. <전태일 문학상>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24 대구신문 신춘 디카시 공모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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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생존게임처럼 느껴지고 어쩐지 덫에 걸려든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우왕좌왕할 때가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만 경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관계에서도 작은 갑질에 억울한 마음이 든다면 그래서 마음을 베인 상처가 벌어졌다 아물길 반복하는 중이라면 당신은 지금, 정지윤 시인의 <투명한 바리케이드>를 만날 필요가 있다.
처음 이 시집을 읽고 카프카의 <성>이 떠올랐다. 토지측량사로 성의 초빙을 받아 이곳에 온 K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렵다. 마을에 머물며 교사의 일을 권유받은 K에게 올가는 말한다.
"클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열렬히 동경하는 우상이 되었으며, 아무리 봐도 무익한 성으로의 여행, 아무리 봐도 헛수고인 하루, 아무리 봐도 허망한 희망뿐이라는 것이다."
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을 사람도 아닌 K는 이방인이다.
<투명한 바리케이드>에서 작가는 K처럼 막막하지만 이방인으로만은 살 수 없다. 노동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담당해야 하는 부모이고, 집을 장만하기 위해 끊임없이 버둥거려야 하는 소시민이고,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돌보는 딸이기도 한 작가는 멀어져 가는 꿈에 저항하는 시인이다. 비록 상처 입더라도 삶을 지켜내야 하고 외면하고 싶어도 직시해야 하는 현실을 시로 담아냈다.
총 4부로 나누어진 시집은 1부, '나 홀로 피어납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에 책의 제목인 <투명한 바리케이드>가 실려있다.
투명한 바리케이드
생계의 좁은 골목
희망이 숨어 있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거대한 자본의 힘
이제는 꿈마저 버려야지
가게 문을 닫는다
투명한 바리케이드
조여 오는 전선에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미세한 권력 저 안쪽
우리는 의심도 없이
스스로 삶을 밀어낸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신상조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옮겨 보았다.
시집의 표제작 이기도 한 작품은 '희망→실패→의심→좌절'의 단계로 시상이 전개된다. "생계의 좁은 골목"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믿었던 '우리'는 레드 오션(Red Ocean) 시장에 뛰어든 선의의 경쟁자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우리'의 실패가 같은 목표와 같은 고객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의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다. "꿈마저 버"리고 "가게 문을 닫"는 '우리'의 사정에는 "모든 것을 제압하는/거대한 자본의 힘"이 작동한다. 이를 두고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경제적 생태계를 잠식해 들어오는 사례를 들면서까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자본의 힘"이 가시적 권력이라면 보다 파괴적인 건 보이지 않는 "미세한 권력 저 안쪽"이다.
정지윤 시인은 2023년 <시인수첩> 겨울호에서 시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나의 하루는 일상과 크게 멀지 않은 '평범함' 속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내가 응시하는 현장은 체제가 정당성을 내세워 부당하게 일상을 침범하거나 왜곡하는 곳이다. 나에게 '바라다봄' 즉 '응시'는 곧 견디는 순간이다. 나의 '견딤' 속에는 응시와 그것이 내부에 응축시킨 힘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런 힘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폭넓은 공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2부, '어느 날 서로 몸 바꿔 찾아온 꿈 하나'에서는 비현실 같은 절망을 현실로 마주하게 되는 작가를 만나게 된다.
실패의 날들
초가을 햇살에 어머니 풀리시네
파리 한 마리 윙윙 귓바퀴를 울려도
먼 곳을 다녀오시네
실패 하나 꼭 쥐고
해어진 젊은 날을 촘촘히 꿰매다가
어디쯤 놓으셨나 기억의 실마리들
딸보다 더 어려져서
할머니를 부르네
세월에 감겨 있던 어머니 헐거워졌네
엉키고 꼬인 마디 살며시 붙잡으니
어머니 풀어지시네
당길수록 작아지시네
풀어도 풀 수 없는 날들이 더 멀어지네
창밖엔 기다리다 늙어버린 햇살이 졸고
누군가 보이지 않는
실패를 감고 있네
3부, '그물로 가득 찬 세계 출렁이는 너와 나'에서는 과거 거대한 사회적인 담론과 철학에서 이제는 치밀하게 사람을 구분 지어 서로를 옥죄는 현실을 답답해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물거미
물속에 능숙하게 그물을 치고 있다
그물에 다닥다닥 물벼룩 결려 있다
어쩌면 줄납자루 떼
호기심도 걸려 있을까
바람에 흔들렸던 허공의 숱한 날들
물결을 타기 위한 수련의 날이었을까
물에서 육지에서도
능숙해진 그물질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서로를 가두는 투명한 그물망들
그물로 가득 찬 세계
출렁이는 너와 나
4부, '꽃피는 나의 봄날은 태어나지 않는다'에서는 생존을 위해 돌파구 없이 이어지는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바이러스 킹덤」에 쓰인 말처럼 사랑도 미움도 없이 스쳐 지나는 모든 것에 우리는 시름 속의 삶을 견디고 있다고 말한다.
고비, 고비
낙타는 짐 하나를
또다시 낳는다
난산의 기억처럼
난폭한 바람이
기나긴 꼬리를 끌고
먹구름을 넘는다
*
파출부, 우유 배달
또다시 계단 청소
모래바람 불 때마다
자꾸만 헛구역질
꽃 피는 나의 봄날은
태어나지 않는다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면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눈빛을 거두고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함께 갇힌 투명한 그물에서 자유로워질 순 없을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힘들게 지켜내고 있는 삶이 사실은 커다란 저항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고충과 포장된 희망을 쫓는 것 말고는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하고 절망으로 움츠린 마음에 "꽃 피는 나의 봄날은 태어나지 않는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런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타인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함께 견디고 있는 애틋함이 자리 잡게 된다.
정지윤 시인은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2014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로 등단했다. 시조집 <참치캔 의족>, 시집 <나는 뉴스보다 더 편파적이다>, 동시집 <어쩌면 정말 새일지도 몰라요>가 있다. 전태일 문학상,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고 2024 대구신문 신춘 디카시 공모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브런치에 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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