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의사가 됐는데 '우울증'? 위로가 독이 됐다

송주연 2024. 2. 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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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97] JTBC <닥터 슬럼프> 하늘의 우울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말>

[송주연 기자]

"내가 우울증이라는 게 말이 돼?" (2회, 하늘)

JTBC 드라마 <닥터 슬럼프>의 하늘(박신혜)이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음을 알게 된 후 내뱉은 말이다. 상담심리사로 일하고 있는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상담실에서 자주 듣는다. 특히, 하늘처럼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자신들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이렇게 한탄하곤 한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결과가 우울이라니 억울하다고도 한다.

<닥터 슬럼프>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억울하게도' 우울증에 걸려버린 하늘과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정우(박형식)가 서로를 보듬는 이야기를 큰 줄기로 한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유쾌한 이들의 이야기는 삶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하게 해준다. 특히, 하늘과 그 주변 인물들이 우울을 대하는 태도는 현실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병'까지는 아니어도 정서 상태로는 경험해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 같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우울. 대체 이 우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닥터 슬럼프>의 인물들을 통해 알아본다.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보듬는 이야기가 그려지는 <닥터 슬럼프>
ⓒ JTBC
   
내가 우울하다니!

부산이 고향인 하늘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가 재밌었던 아이였다. 덕분에 늘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였고 가족들은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가족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화장실 갈 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부를 한 하늘은 서울의 한 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역시 공부로 최고인 정우를 만난다. 둘은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부해 각자 의대에 진학한다.

의사가 된 하늘은 이젠 마취과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펠로우로 일하며 온갖 모욕적인 언행을 받아낸다. 하지만, 목표를 위해 참아내고 또 참아내다 횡단보도에서 쓰러졌던 날. 하늘은 자신을 달려오는 트럭을 보고 '차라리 죽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하늘은 몇 번을 망설이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고 우울증 진단을 받는다. 이후 드라마는 하늘이 우울증을 마주하는 과정을 꽤 섬세하게 보여준다.

첫 반응은 부인이었다.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오던 날 하늘은 약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며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애써 다시 꺼내온 약은 서랍 깊숙이 숨겨 놓는다. 그러면서 "내가 우울증인 거 자체가 자존심이 상해", "나 정말 대단했는데 내가 우울증이라는 게, 내 마음이 병들었다는 게 말이 돼?"라며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다음엔 후회가 찾아온다. "이 나이 먹도록 아는 노래 하나도 없다는 게 한심해서. 해본 게 하나도 없는데 이게 정상적인 삶이냐. 나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을까."(3회) 그리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동안 공부하고 일하느라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재밌게 살아보기 위해 한 것들이 전혀 재밌지 않자 하늘은 또 다시 자괴감에 빠지며 이렇게 말한다.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해. 꼴 보기 싫어."(4회)

하늘의 이런 모습은 꽤나 익숙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마음이 아프다고 진단을 받았을 때 이를 나약함의 징표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어서 더 힘들어한다.

지나친 위로와 응원은 오히려 독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마음이 아플 때 이를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힘든 것일까. 하늘의 주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의 가족은 하늘을 '자랑거리'로 여긴다. 하늘이 집에 오는 날이면 엄마 월선(장혜진)은 특식을 준비하고 틈만 나면 식당 손님들에게까지 딸이 의사임을 말하고 싶어 한다(2회). 하늘의 엄마는 자신의 꿈을 딸에게 투사하고, 딸을 다그쳐 키워온 엄마가 아니다. 그럼에도 딸의 성공에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공(그것도 획일적인 기준에 의한 성공)=행복'이라는 잘못된 공식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이런 공식 속에 살아온 하늘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사가 되었고 조금만 더 버티면 의대교수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찾아온 우울증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을 테다. 성공의 길을 가고 있으니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이라 믿었을 테니 말이다. 하늘에게 우울은 단지 아픈 게 아니라 '실패'의 의미까지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울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하늘은 우울증 진단을 받는다.
ⓒ JTBC
 
우울을 알게 된 후 가족들의 반응 또한 우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하는 요소다. 하늘이 그냥 힘들다고 했을 때는 "세상에 욕 안 먹고 일하는 사람이 어딨냐"며 버티라던 월선은 우울증 약을 발견한 후에는 하늘에게 지나치게 미안해한다. 그러다 '엄만 훌륭한 딸보다 안 아픈 딸이 더 좋다. 니가 무엇이든 엄마는 널 사랑하고 아낀다'라고 문자도 보낸다. 하늘이 집에 오자 "(우울증 약을) 당당히 먹어라. 엄마가 우울증 극복하도록 도와줄게"(3회)라고 응원도 보내준다. 또 가족들은 하늘에게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 주기 위해 '우울증 파티'까지 열고 하늘을 돕기 위해 애쓴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라는 메시지에 하늘은 눈물을 쏟으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2회). 즐거운 경험 역시 우울증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울하면 가뜩이나 심리적 에너지가 낮아지는데 힘을 내서 극복하라고 '화이팅'을 외치는 것은 당사자에게 오히려 큰 병에 걸린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거나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오기 쉽다. 이럴 때 우울은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하늘 역시 '왜 다들 극복하라고 난리야'라며 이런 가족들을 힘겨워한다(3회).
 
그럼에도 삶은 나아간다

반면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우의 반응은 다르다. 정우는 하늘의 하소연을 그저 들어주면서 사소한 것들을 함께 한다. 떡볶이를 먹고, 오락실에 가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최선만다하다 쓰러졌지"라고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하늘에게 "우리 쓰러진 김에 좀 쉬자"라고 말해준다(3회).

이 말을 들은 날 처음으로 하늘은 자신의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한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독백한다.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은 무너졌고 나는 꽤 거창한 위로를 받길 원했다. 그렇지만 떡볶이가 오락실이 쓰러진 채 있으라는 말도 안 되는 위로가 오늘 밤은 편히 잠들게 해줄 것 같다' (3회)

이는 마음이 아플 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삶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쓰러져 있거나 쉬어가는 삶도 의미 있음을,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가 결국엔 우울을 조금 더 편하게 바라보게 했던 것이다. 사실, 이는 단지 '위로'가 아니다. 쉬어가고 쓰러져 있어도 삶이 괜찮다는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드라마는 쓰러져 있는 삶 속에서도 웃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과 정우는 삶의 위기 속에서도 해를 보러 가서 장난을 치고, 때로는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는다. 옥탑방에 올라 맥주 한 잔 하며 비를 맞는 소소한 낭만도 즐긴다. 이처럼 우울해도 슬럼프에 빠져도 웃고 즐기는 시간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씁쓸한 가운데에도 달콤함이 깃들여 있는 것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우울한 가운데에서도 웃으며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 JTBC
 
<닥터 슬럼프>가 보여주듯 시원하게 달리던 삶의 길이 막히고 우울에 빠져도 삶은 결코 멈춰서지 않는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늘 행복한 것도 아니고 우울하고 막막하다고 해서 늘 불행한 것도 아니다. 삶은 언제나 양가적이기 때문이다. 수용전념치료를 주창한 스티븐 헤이즈는 저서 <자유로운 마음>에서 삶의 많은 부분들은 '그러나' 혹은 '그런데'가 아니라 '그리고'라고 바꿔 말할 때 더 잘 설명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리다니 말이 돼!" 대신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우울하다"로 바꿔 말해보자는 것이다. 어떤가? '그리고'로 말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지 않은가. 오히려 삶이 더 유연하고 풍성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우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이러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닥터 슬럼프>가 이를 더 잘 그려 나가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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