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한입'으로 압도하는 짜장면... 왜 우리가 사랑하게 됐을까

이정희 2024. 2. 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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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짜장면 랩소디> 우리의 추억이 된 음식

[이정희 기자]

'자극 오브 자극, 마치 우주 속에 떠있는 느낌이예요.'
'이 정도면 그냥 반칙이 아니라, 5반칙 퇴장감입니다',
'시커멓게, 못생겼어요. 그런데 먹는 순간 그 모든 오해가 풀려버려요.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하는 음식이예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그 첫 맛부터 매료되는 유일한 음식이 아닐까요?'
'볶는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설레요.'

과연 이렇게 찬사에 찬사가 거듭되는 음식이 무얼까? 돼지와 춘장이 만난 고소함,  양파까지 함께 볶아지며 만들어지는 폭발적인 하모니, 바로 '짜장면'이다. 우리가 즐기는 '불맛'의 원조인 것이다. 그간 이른 바 푸드 다큐멘터리 <랩소디> 시리즈로 이른바 k푸드를 정립시켜온 제작진이 삼겹살, 냉면, 한우에 이어 네 번째로 택한 음식은 '짜장면'이다. 그런데, 짜장면이 우리나라 음식이라 할 수 있을까? 1부 짜장면 먹는 날은 시작은 바다 건너였지만 어느 새 우리나라의 음식이 되어버린 짜장면을 살핀다. 

 
 <짜장면 랩소디>
ⓒ kbs1
 

좋은 날엔 짜장면!

프리젠터로 나선 백종원 씨는 말한다. '한국인에게 짜장면은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라고. 2021년 기준 전국의  2만 9천개의 짜장면 집, 하루를 기준으로 하면 600만 그릇이 팔렸다고 한다. 면의 길이를 합치면 지구를 한 바퀴 반 돌 정도가 된다. 이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정도라면 이젠 k 푸드라고 할 만도 하지 않을까. 

밖에 나가서 사먹을 수 있는 것이라봐야 김치찌개, 불고기가 전부이던 1960년대, 짜장면은 생일이나, 졸업식처럼 좋은 날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외식이 되었다. 

백종원 씨는 회상한다. 그가 아이였던 시절, 중국집은 이국적 세계로 그를 매혹시켰다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낯선 언어, 공기, 그리고 냄새와 소리까지 이국적인 문화가 그를 긴장시켰다니. 어디 백종원씨 뿐이었을까. 
 
 <짜장면 랩소디>
ⓒ kbs1
 

한 반에 아이들이 90명 정도되던 시절, 졸업, 입학식이면 모처럼 아이를 앞세운 가족들은 모처럼 이방의 문화와 맛을 맛보기 위해 중국집으로 향했고, 북적이는 사람들 성화에 '신발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의 유래가 되었을 정도라니.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나서 어른이 되면 당구장에서 짜장면을 만나고, 가족을 이뤄 이사를 하면 이삿날 빠짐없이 짜장면은 등장했으니, 지나온 시절의 구비구비 행복하고 좋은 순간마다 짜장면은 함께 해왔다.  

그런게 정작 그 시조가 되는 중국에 가서 짜장면을 시키면 100% 실망하고 만단다. 짜짱면이 유래라고 알려진 산둥 지방의 짜장면은 삶은 면 위에 볶은 춘장을 얹은 단촐한 음식이다. 거기에 갖가지 야채를 얹어 비벼먹는다는데, 말이 볶음 춘장이지, 감칠맛도 부족하고, 단 맛도 거의 없어 짜장면인데 짜장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영하 교수는 이제는 k푸드가 된 짜장면을 '중국계 한식'이라 정의한다. 그 시작은 무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을 거스른 구한말이다. 

화교의 땀과 눈물에 버무려진 우리 현대사

1882년 임오군란, 이어 1883년 개항이 되고 중국인들이 제물포(지금의 인천)로 몰려왔다. 부두의 짐꾼 등으로 일을 하던 이들은 끼니 때가 되면 국수를 삶아 춘장을 얹어 비벼 먹었고, 그 시초는 '장을 튀긴 면'이라는 의미의 '작장면(炸醬麵)'이고, 이를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자장멘'인 것이다. 

원조 '자장멘'은 차게 먹는 음식이라 한다. 그러던 것이 우리나라에 맞춰 '진화'하며 갖은 야채를 함께 넣어 볶고, 거기에 단 맛을 더해 풍미 가득한 오늘날의 짜장면이 되었다는 것이다. 

 
 <짜장면 랩소디>
ⓒ kbs1
 

다큐는 초창기 짜장면에 사용된 춘장을 재현한다. 삶은 콩에 찐 밀가루를 더해 발효를 시키고 곰팡이가 피면 소금물을 더해 고소한 원조 춘장이 만들어 진다. 갓 만들어진 춘장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검은색이 아니라 누르스름한 빛깔이었다고 한다. 3년 정도 지나야 검은 색을 띠었다는데, 우리 선조들이 집집마다 장을 담그고, 장맛이 다르듯, 초창기 화교들은 집집마다 춘장을 담궜고, 그래서 자장면의 맛이 달랐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48년 사자표 춘장이 카라멜을 넣은 춘장을 대량 생산하고, 그때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 '춘장'을 넣은 '표준화된' 짜장면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미국으로부터 밀을 무상원조를 받게 된 정부는 이후 1960~70년대 밀의 소비를 위해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쳤고, 밥을 먹지 않는 무미일(無米日)까지 지정했는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짜장면은 싸고 맛있는 음식의 대명사가 되어갔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부는 사람들이 즐겨먹는 짜장면의 값을 통제했다. 1960년에 60원, 설렁탕, 비빔밥보다 쌌으니, 사람들이 더욱 짜장면집을 찾게 되었다. 맥주값이 300원을 하던 시절에도 80원이던 짜장면은 1995년 2000원 2023년 6000원 여전히 상대적으로 부담없는 한 끼 식사의 대명사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중국집이 많아진 것도 있지만, 거기에 우리나라에 정착하기 힘들었던 화교사의 비극이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잠시 우리나라에 머무르고자 했던 '화교'들은 이제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아가 정부는 1968년 외국인 토지법을 만들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규제했다. 그런 법들로 인해 화교들은 우리나라 회사에 취업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가능한 직업이 '중국집'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사회의 '배타성'이 만들어 낸 가족 사업이 '중국집'이 된 것이다. 

이제는 '명장'이 된 여경래 씨는 중국 사람으로 할 것이 중국집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짜장면 냄새를 맡고, 양파를 까며 자란 아이는 대를 이어 중국집을 하게 됐고, 그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에 남은 대를 이른 화교들이 하는 중국집이 되었다. 

그렇게 늘어난 중국집들은 자신들의 춘장을 얹은 볶음면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돼지 고기에 야채를 함께 볶아 달착지근하게 만든 짜장면으로 진화시켰다. 제물포에서 중국집을 시작한 화교들은 전쟁을 겪으며 부산으로, 군산으로 그들의 터전을 옮겨갔다. 덕분에 통영의 '우짜', 목포의 '중깐', 전북의 '물짜장'처럼 지역 특성을 살린 새로운 짜장면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없다고 지역에 자리잡은 화교들에 의해 만들어진 중국집들은 이제 노포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 한복판에서는 스테이크와 트러플을 얹은 신개념 짜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토바이 회사가 짜장면 배달을 위해 배달용 오토바이를 생산하게 만들었다는 짜장면 배달, 배달앱의 활성화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배달 음식으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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