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 순교한 목사 박연세

김삼웅 2024. 2. 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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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82] 신사참배와 총독부의 전쟁협력 강요에 저항해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군산 만세 운동의 발상지 구암교회 한강 이남에서 제일 먼저 만세 운동이 불려지던 곳.
ⓒ 이숙자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수탈이 극점에 이르렀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징병징용·성노예에 이르기까지 말기적인 광기를 보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박연세는 3.1혁명 당시 전북 군산 영명학교 교사와 구암교회 장로로서 이 지역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26년부터 1940년까지 목포 양동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와 총독부의 전쟁협력 강요에 저항하다가 1942년 11월 불경죄 및 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3년 겨울 옥중에서 고문으로 순교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이 1903년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에 설립한 영명학교
ⓒ 군산시청
 
박연세 목사에 대한 복심법원 판결문이다.   

피고인은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의 감화에 의하여 21세 때 예수교신자가 되고, 대정(大正) 11년(1922)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예수교 교육을 받고 대정 13년(1924) 3월 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4년(1925) 3월 경부터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고현리, 동군 황등면 동연리 등의 예수교회 목사를 역임하고, 대정 15년(1926) 9월부터 원심 주거지의 장로파 예수교 양동교회 목사가 되어 이 교회에서 신도 2, 3백명을 가지고 십수년 동안에 걸쳐 예수교의 포교에 힘쓰고 있으며, 본건에 의하여 동 목사직을 사임하기에 이른 바, 소화 17년(1942) 8월 30일 경 오전 10시 30분쯤부터 동일 오전 11시 30분쯤 까지 사이에 전기 양동교회당에서 목포부 죽교리 124번지 송전승(松田昇) 외 40여 명의 신도에 대하여 설교할 때 "육체적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 존경해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해야 한다"는 뜻의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두렵게도 지존(至尊-천황)에 대하여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위에 있는 듯한 언사를 함부로  함으로써 불경(不敬)의 행위를 한 자이다. 

증거를 살피건대 판시 사실 중 맨 앞에 기재한 피고인의 경력 및 직업에 대한 점은 피고인의 진술로서 원심공판 조서 중 판시와 같은 뜻의 기재에 의하여 이를 인정하고, 나머지의 점은 피고인이 판시한 무렵 판시한 교회에서 판시한 신도에 대하여 설교하였다는 뜻의 피고인이 당 공판정에서 한 공술과, 피고인에 대한 사법경찰관의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 중 그 공술로서 판시한 무렵 판시한 교회당에서 김태균 김동만 등 3, 40명의 신도에 대하여 설교 중 신사참배와 신관과 관련된 여담이 나왔을 때 목사의 입장에서 성서를 떠나서 말하는 것은 양심상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천황을 제일 숭배해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숭배해야 한다는 뜻의 말을 한 사실이 있고 이는 성서에 비추어 과거의 신념으로서 종교상에서는 그리스도가 천황의 위에 있는 듯한 실언을 한 것이라는 뜻의 기재 및 검사의 증인 송전승 및 사법경찰관 사무취급의 증인 김동만에 대한 각 신문조서 중 동인들의 공술로서 피고인은 판시한 무렵 판시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였음에 틀림없다는 뜻의 각 기재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할 수 있으므로 판시 사실은 그 증명이 있는 것으로 한다. 

법률에 비추어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형법 제74조 제1항에 해당하므로 그 형기 범위 안에서 피고인을 징역 10월에 처하고 동 법 제21조에 의해 원심에서 미결 구류일수 중 90일을 위 본형에 산입하기로 한다. 

본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은 
제1, 소화(昭和) 17년(1942) 7월 7일 지나사변(중일전쟁) 기념일을 당하여 오전 10시 30분경부터 동일 정오 경까지 목포부 양동교회당에서 동부 죽교리 124번지 송전승 외 50여 명의 신도에 대하여 설교할 때 "오늘은 지나사변 제5주년 기념일인 바, 일본은 다시 미·영을 상대로 하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독일도 소련과 교전 중인데 이것들은 모두 약육강식의 전쟁이다"는 뜻의 말을 함부로 하여 대동아전쟁의 숭고한 목적을 비방하는 듯한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시국에 대하여 조언비어를 하고, 

제2, 동월 26일 경 오후 3시쯤 판시한 양동교회에서 집사인 송전승(당 42세)과 장로인 김재현(당 57세)으로부터 피고인이 국어(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목사로서 적임자가 아니라는 뜻의 말을 듣자, "당국은 내선일체의 조급한 실현을 위하여 국어(일본어) 상용을 장려하고 조선예수교 신자 중에도(이에) 공명하는 자가 있지만 국어상용은 국가의 방침에 불과하므로 교회 안에서는(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함부로 말하여 조선통치상 중요한 정책의 하나인 국어상용에 반대함으로써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라는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및 보안법 위반의 점은 모두 이를 인정하기에 믿을만한 증거가 없어 공소사실은 결국 범죄의 증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형사소송법 제362조에 의하여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언도하기로 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소화 19년(1944) 1월 2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2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사토(佐藤保茂)
조선총독부 판사 지쿠하라(軸原壽雄)
조선총독부 판사 오승근(吳承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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