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떠난 후…달동네 주민들 "서민 어려움, 알고 가야 할텐데"
백사마을 남은 100여명은 열악한 환경 속
"기부 감사하지만…정치인 안 믿어"
햇빛이 내리쬐지만 공기는 아직 차가운 날이었다. 지난 8일 오후 3시께 머리가 희끗한 김모씨(73·남)가 조용한 서울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의 공터에 맨발에다가 슬리퍼 차림으로 나왔다. 차량 5대가 주차돼 있어 분명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백사마을에는 소음 하나 없었다. 김씨는 다리가 불편한지 반 발자국도 안 되는 보폭으로 종종걸음을 열심히 걸었다. 김씨는 걸으면서 어디선가 소음이 나는가 싶으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걷는 데 집중했다. 백색소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적막감 속에 넓은 공터를 천천히 걷는 70살 넘은 노인을 보자니 시간이 멈춘 듯했다.
김씨가 산책을 하기 3시간 전만 해도 백사마을은 시끌벅적했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가 연탄 나눔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백사마을을 찾았다. 한 위원장은 오전 10시30분부터 한 시간 넘게 직접 수레를 끌면서 집마다 연탄을 배달했다. 아울러 매년 6000~7000만원가량을 연탄 기부하는 데 쓰겠다고도 약속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연탄 배달을 마치고 오는 4월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다짐과 서로를 향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정치인들 왔구먼?" 김씨는 '한 위원장이 방문한 것 알았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방문하고 연탄을 기부하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전쟁 같은 총선을 코앞에 두고 과연 백사마을을 신경 쓸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그는 백사마을에서만 40년 넘게 살았다며 이곳을 찾은 정치인의 역사를 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거든요? 와서 꼭 재개발을 해준다고 약속했지만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더라고. 이후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이 돌아가며 여러 혜택을 이야기했지만 역시 된 게 없어. 이제는 별 기대도 안 해요."
백사마을은 1967년 당시 용산, 청계천, 안암동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만들어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다. 백사마을이란 이름도 중계동 '104번지'에서 급하게 따왔다. 백사마을이 재개발된다는 말만 나온 지는 40년이 넘어간다. 재개발 사업 구체화는 2009년 주택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부터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하지만 2016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성이 낮다며 시행자격을 포기하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재개발보다는 지역의 모습을 지키는, 즉 원형보전으로 사업 방향을 트는 등 재개발이 계속 난항을 겪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재개발 사업이 삽조차 뜨질 못하는 동안 내부적으로 갈등이 커졌다. 이날 연탄을 나르고 있는 한 위원장의 앞에 두 노인이 나타나 크게 두 가지 사연을 털어놓았다. 첫 번째는 더 높은 고층 아파트, 더 넓은 단지가 들어서도록 규제를 풀어달라는 것, 두 번째는 가옥주들의 대표 권리를 부여받은 주민대표위원회가 잘못된 운영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두 노인이 말하는 동안 다른 데서는 "(가옥주) 95% 이상이 이 사업을 찬성하고 있는데 반대세력이 이런 주장을 한다. (한 위원장은) 꼭 사실 확인을 하셔야 한다"고 소리쳤다. 한 위원장은 "균형 있게 잘 파악하겠다"고 답했다.
"재개발은 무슨, 내가 죽어야 시작할걸요?" 김씨는 재개발을 둘러싸고 샅바싸움 하는 사람들만 보면 코웃음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곳 거주민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재개발을 진행하면 또 차일피일 밀릴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 마을 주민들은 전체 1100가구 가운데 약 100가구만 실질적으로 거주 중이라고 전했다. 대부분은 재개발 관리처분 인가를 앞두고 있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아직 남은 사람들은 옮길 여력조차 안 돼 백사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고령인데다 건강도 좋지 않아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김씨 역시 나이가 들어 수입이 없고 자식 덕도 볼 수 없어 가능한 한 오래 백사마을에 머물 예정이다. "임대 주택에 들어간다고 쳐요. 그래도 보증금 내야 하지, 월세 내야 하지, 난방비 내야 하지. 지금보다 나가야 할 돈이 생각보다 많아진다 말입니다." 무엇보다 무허가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철거 작업 중에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 오늘 정치인이 왔었다고?" 연탄을 정리하고 바닥을 물청소하던 조모씨(63·여)는 이날 정치인이 왔는지도, 그 정치인이 누군지도 잘 모른다. 한 위원장을 만났다면 어떤 말을 전달하고 싶었냐고 묻자 그저 눈이 많이 와서 구멍 뚫린 집 천장을 고치고 싶다고 했다. 천장을 보니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려있었다. 구멍 몇 개는 일단 전기 테이프로 막아놨다. 천장만 문제 있는 게 아니다. 여름이 되면 집 안에 물이 넘치고 벌레가 잠 못 들게 한다. 한겨울에는 찬바람이 문틈 사이로 들어와서 괴롭힌다.
"저 천장에 있는 구멍만 문제인가, 입이라는 구멍이 가장 문제야." 올해로 70살이 된 조씨의 남편은 경기 파주시로 새벽에 떠났다. 노년이지만 건설현장 일당을 벌기 위해서다. 백사마을에서 파주시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해도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굶을 수는 없으니까 남편이 멀리까지 일하러 가는 거지. 이런 서민들의 어려움을 정치인들이 꼭 알고 가야 할 텐데."
조씨는 정치인들이 떠난 후 조심스레 나와 장도 보고 휑한 백사마을 공터도 둘러봤다. 본지 기자가 조씨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소리쳤다. "총각! 총각!" 뒤돌아보니 조씨가 종이와 펜을 들고 왔다. "그래도 오늘 정치인이 왔으니까, 남편한테 이야기 해줘야지. 그 정치인 이름이 한…뭐라고?"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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