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스케이트·박세리 클럽 '예비문화유산'된다?
"논란 여지 없을 유산 10건 이상 선정"
서울올림픽 굴렁쇠, 64M DRAM 등 유력
올해 문화재청은 제작·형성된 지 50년이 지나지 않은 현대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할 틀을 마련한다.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9월 15일부터 '예비문화유산' 제도를 시행한다. 기존 근대 문화유산에서 현대 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 범위를 넓히고 활용 방안을 모색한다.
현대 문화유산이 방치되거나 훼손될 여지를 최소화하려는 조처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50년이 넘은 근현대 문화유산만 등록 대상으로 검토했다. 이 기준을 벗어난 현대 문화유산은 역사·예술·사회적 가치를 평가받기도 전에 손상되거나 실종되는 일이 적잖게 있었다.
보유자의 동의를 전제로 빈틈을 메울 예비문화유산은 현대의 삶과 문화를 대표하거나 보존·활용 가치가 높은 유산으로 구성된다. 시발점은 5월부터 진행되는 대국민 공모전이다. 우리나라 역사·문화·예술 등 분야에서 상징·교육적 가치가 있거나 기술 발전으로 해당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접수한다. 단 건축물은 대상에서 제외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아직 명확한 심사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다”면서도 “첫발을 떼는 만큼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한 유산으로 열 건 이상을 선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등록문화유산에 준하는 기준을 세우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심사에 참여시켜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이겠다”고 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유산은 김연아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신은 스케이트다. 김연아는 한 치 오차도 없는 연기로 역대 여자 싱글 최고점(228.56점)을 받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인 사상 최초로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딴 주인공이 됐다.
스케이트는 단순히 영광의 순간을 함께한 운동기구에 그치지 않는다. 남다른 노력과 인내가 스며든 투혼과 열정의 상징이다. 김연아는 선수 시절 복숭아뼈 부위의 굳은살과 상처로 퉁퉁 부은 발을 노출한 적이 있다. 당사자는 못생긴 발이라며 부끄러워했지만 ‘아름다운 발’이란 찬사가 쏟아졌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고된 훈련의 고통을 참아온 데 대한 놀라움을 넘어 존경스럽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자 2013년 당시 김황식 총리는 ‘예비문화재’ 도입을 강조하며 김연아의 스케이트를 첫손에 꼽았다. 문화재청도 2017년 ‘50년 예외 규정’을 유연하게 적용하겠다면서 같은 예시를 들었다. 가치가 충분하다는 긍정론이 주를 이뤘으나 부정론도 적잖게 제기됐다. 대부분 살아있는 사람의 신발까지 문화유산으로 대접한다는 것이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올림픽 때마다 금메달을 쓸어 담는 양궁선수들의 활은 어쩔 거며, 박찬호의 글러브, 박지성의 축구화, 박태환의 수영 팬티도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예비문화유산 제도의 명확한 기준 설정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박세리가 1998년 US 여자오픈 골프에서 사용한 클럽도 마찬가지다. 상징적 가치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박세리는 대회 연장전 서든데스 두 번째 홀에서 버디를 기록해 세계 여자골프의 챔피언으로 우뚝 섰다. 특히 연장전 18번 홀에서 보여준 모습은 IMF 위기에 힘들어하던 많은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내리막 급경사에다 물에서 약 2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공을 신발과 검정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때려 안전하게 탈출시켰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하얀 맨발은 거무스름한 다리와 극단적 대조를 이뤄 남다른 노력과 인내를 짐작하게 했다.
문제는 시기다. 선수 생활을 은퇴했으나 최근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왕성하게 활동해 이른 감이 있다. 개인이 잘 관리하던가, 박물관 같은 곳에서 보존하다 문화유산의 향기가 짙게 밸 즈음 국가적으로 관리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이 나온다. 클럽이 수입품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걸림돌이다. 박세리는 당시 드라이버부터 퍼터까지 전부 캘러웨이 제품을 사용했다. 문화유산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만한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체육계에선 바늘구멍을 통과할 가능성이 가장 큰 유산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굴렁쇠를 꼽는다. 당시 일곱 살이던 윤태웅 씨가 개회식에서 홀로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렇게 약 2분간 유지된 정적은 전쟁·냉전 같은 시끄러운 어른들 세상의 종식을 가리켰다. 전쟁고아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도 부여했다.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 오늘날까지 서울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행위예술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기획한 이는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던 고(故) 이어령 교수였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문화부 장관에 임명됐다. 굴렁쇠는 윤 씨가 17년간 비닐에 싸서 보관해오다 2005년 국민체육진흥공단에 기증했다.
산업 분야에선 삼성전자가 1992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한 64M DRAM의 입성이 유력시된다. 한글 400만 자를 기억할 수 있는 손톱 크기의 칩이다. 이 개발을 계기로 삼성전자는 이듬해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이후 256M DRAM과 1G DRAM을 잇달아 개발하며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석권했다.
디지털캐스트가 새한정보시스템과 함께 1998년 내놓은 ‘MP-F10’도 유력한 후보다. 세계 최초의 MP3플레이어다. '컴퓨터에 저장된 음악파일을 휴대용 플레이어에 담아 들으면 어떨까'라는 발상이 1년여 연구 끝에 결실로 이어졌다. 발매 당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마케팅 등에서 고전해 미국 기업 시그마텔에 매각되기에 이르렀다. 아이리버가 2003년 특허권을 다시 매입해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다른 국내 기업들과 세계 MP3플레이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2007년 애플이 터치 디스플레이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인기가 시들해졌으나 인류의 디지털 소비 행태를 혁신적으로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LG전자 전신인 금성사가 1984년 선보인 최초의 김치냉장고 ‘GR-063’도 눈여겨볼 만하다. 플라스틱 김치통 4개(총 18㎏)가 들어간 45ℓ 용량의 고급 기능성 냉장고다.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배우 이경진 씨가 광고모델로 활동해 화제를 모았으나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 보급률이 낮고 단독주택 거주자가 많았다. 대다수 가정이 김칫독에 김장김치를 담아 앞마당에 묻었다.
국내 최초 개인용 컴퓨터인 ‘SE-8001’도 예비문화유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삼보컴퓨터의 전신인 삼보전자가 청계천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1981년 1월에 완성했다. 외국의 개인용 컴퓨터를 들여와 개조하고, 텔레비전 수상기를 모니터 대용으로 합체했다. 주로 기업의 회계 관리용으로 사용했지만, 한국 개인용 컴퓨터(PC)의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평가받는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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