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만 특별한 편의점…설 맞는 쪽방촌 온기창고 [가봤더니]
“떡국떡이랑 만두도 가져가서 떡만둣국 해 드셔요.” (온기창고 관계자)
“아이고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쪽방촌 주민)
먹거리 한 봉지를 한 손에 들고, 주름진 어르신의 얼굴에 꽃이 폈다. 12평 남짓한 공간에 마련된 생필품, 먹거리 진열대에서 찬찬히 꼭 필요한 물건 찾아 장바구니에 담았다. 평범한 편의점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이곳은 서울에 몇 없는 특별한 편의점 ‘온기창고 2호점’이다.
따뜻한 마음 나누는 쪽방촌 온기창고
설 연휴 전날인 8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온기창고 2호점’은 오픈 시간인 10시부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쪽방촌 손님들로 북적였다. 온기창고는 쪽방촌 주민들이 편리하게 후원받은 생필품과 먹거리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서울시가 마련한 동행스토어다. 지난해 8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위치한 1호점에 이어 11월 2호점이 문을 열었다. 2호점은 1호점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쌀, 과자, 라면, 각종 반찬, 김치 등 다양한 먹거리와 치약, 세제, 휴지 등 생필품이 알차게 구성됐다.
돈의동 쪽방상담소 관계자 1명과 쪽방촌 주민이자 자활근로자 3명이 이날 온기창고를 찾는 주민들을 맞았다. 오픈 시간부터 사람이 몰리는 화요일에 비해 목요일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라고 했지만, 연이어 들어오는 주민들의 구매를 돕고 빈 진열대에 물건을 채워 넣는 직원들의 모습은 쉴 틈이 없었다.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시간 동안에만 주민 45명이 온기창고를 찾았다. 약 500명이 사는 돈의동 쪽방촌에서 이틀 전 화요일에만 절반가량인 250명이 찾았다고 한다.
“어르신, 아직 2000포인트 남았어요. 오늘 다 못 쓰면 소멸하니까 두유라도 챙겨가세요.”
“형님, 김치 좀 챙겨가요. 누님, 쌀도 가져가세요.”
온기창고는 쪽방촌 주민 개인이 배정받은 적립금 한도 내에서 자율적으로 물품을 골라 구매하는 시스템이다. 화요일과 목요일만 문을 여는 2호점은 일주일에 1만 포인트, 한 달에 총 4만 포인트가 지급된다. 한 주에 배정받은 적립금을 모두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하기 때문에 온기창고 직원들은 주민들이 포인트를 전부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고물가 시대에 일주일 1만 포인트는 적어 보일 수 있지만, 온기창고 품목은 시중 마트와 비교해 저렴한 편이라서 대부분 만족하는 분위기다. 시중에서 7000원이 넘는 고추장은 3000포인트, 1만원이 넘는 건표고버섯은 1000포인트에 판매되고 있었다. 휴지, 초콜릿 등 인기 상품은 최대한 많은 주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판매 수량을 정해놨다. 이날 김치, 컵 떡국, 컵 누룽지, 참기름, 황도 통조림을 1만 포인트에 구매한 박모씨는 “저렴하고 먹을 것이 많아서 좋다”고 했다.
온기창고에서 설 명절 준비…“필요한 것 다 있죠”
자활근로자 A씨에게 ‘어떤 품목이 잘 나가느냐’고 묻자,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한데 고등어, 초코파이를 많이 사 간다”고 말했다. 설 연휴 하루 전날인 이날 쪽방촌 주민들의 장바구니에는 떡국 재료가 공통적으로 담겼다. 온기창고 관계자에 따르면 설 명절을 앞두고 떡, 만두 등이 부족했는데, 때마침 개인 후원자가 직접 경동시장에서 떡국떡과 만두를 구매해 후원했다고 한다.
설 명절과같이 특별한 날이 아닌 날에 단연 인기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품이다. 1인가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날도 떡국 재료를 제외하고 주민들의 장바구니를 채운 건 유통기한이 긴 커피믹스나 즉석식품, 라면, 통조림, 두유 등이었다. ‘희망 물품 게시판’도 있어 주민들이 희망하는 품목을 자유롭게 적을 수 있었다.
쪽방촌 주민 B씨는 “(온기창고에) 필요한 먹을 건 다 있다”며 “오늘 산 걸로 그냥저냥 설을 지내려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C씨도 “여기(온기창고)에 물건이 다양하게 있어서 좋다”며 이날 구매한 먹거리로 설 명절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자활근로자 김모씨는 “이곳(쪽방촌)에는 혼자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 명절 전에 다 챙겨가시는 것”이라며 이렇게 구매한 물품으로 이웃과 설 연휴를 함께 보낸다고 전했다.
온기창고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쪽방촌 주민이자 자활근로자 D씨는 “예전보다 훨씬 낫다. 전에는 후원 물품이 들어오면 (쪽방상담소에서) 박스에 담아 나눠줬다. 후원에 한계가 있다 보니 못 받는 주민도 있어서 큰 소리가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줄을 서지 않아도 원하는 물건을 배급받기 편한 환경이 된 것이다. 자활근로자인 E씨는 “다양한 물건을 고를 수 있어서 좋다”며 “주민들도 너무 좋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온기창고는 온기를 낳고
온기창고가 생기고 쪽방촌에도 변화가 왔다. 온기창고의 온기는 매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네 곳곳으로 퍼졌다. 포인트로 잡곡을 구매한 한 주민은 매장을 찾은 다른 주민에게 “밥할 때 넣으시라”며 잡곡을 선물하기도 했다. 쪽방상담소 관계자는 “누군가에게는 포인트가 부족해도, 또 누군가에겐 포인트가 남을 수 있다. 소멸될 바엔 필요한 걸 사서 주변 분들에게 나누기도 한다”고 말했다. 쪽방촌 주민들이 사용하지 않는 물품을 온기창고에 기부하면 물품에 따라 책정된 포인트를 쿠폰으로 받는 나눔 낙수효과도 생겼다.
온기창고의 또 다른 목표는 ‘재활 및 자활사업’이다. 쪽방촌 주민들이 일자리를 갖고 노하우를 습득하며 경제적 안정감과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를 보겠다는 것이다. 서울역 노숙자 ‘독고’가 작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채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불편한 편의점’과 비슷하다. 이를 위해 세븐일레븐과 주민을 정식 캐셔로 고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한다. 또 임시 운영 중인 돈의동 2호점을 현재보다 매장을 넓혀 주민들에게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최선관 돈의동 쪽방상담소 실장은 “(주민들의) 물건에 대한 집착이나 경쟁이 줄었다. 쌀이나 전기장판, 커피믹스 등 자기 물품을 기부하기도 한다”며 “쪽방촌 하면 삭막하고 팍팍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온기가 생겼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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