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열차 창문으로 사람 꾸역꾸역, 외국 아닙니다 [신문 사진으로 본 설 연휴]
펜스가 쳐진 서울역 개찰구 통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때 묻지 않은 고무신. 한 역무원이 가방을 주워 살펴보고 있다. 1967년 구정(당시는 설 대신에 구정이란 말을 주로 썼음)을 하루 앞둔 2월 8일 자 중앙일보 3면에 실린 사진이다. 함께 실린 기사 소제목은 7만여명이 몰린 서울역에서 아귀다툼 속에 6명이 다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구정 이틀 전부터 몰린 인파로 1966년보다 여객이 35% 늘었으며, 이들에게서 받은 돈은 자그마치 1천3백2만2천3백원으로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다'며 기사는 서울역이 올린 수익에 대한 얘기를 담담하게 전했지만, '친지에게 선물하려던 신이랑 젯상에 바치려던 사과랑 아껴 간직해두었던 정미년(1967년) 달력을 개찰구에 버린 채 귀성객들은 설을 쇠러 고향으로 떠났다'는 설명이 붙은 사진은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모습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아수라장이었는지는 기사 왼쪽에 실린 작은 사진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출발 시각이 임박한 듯 역무원들이 몰려든 승객을 열차 창문으로 밀어 넣고 있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인도에서나 봤을 법한 기차에 매달려 가는 모습이 1967년 설 우리나라 서울역에서도 펼쳐졌다.
한 해 앞서 1966년 1월 21일 중앙일보 3면이다. 역시 설을 앞두고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 풍경으로 마치 1967년 아수라장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모습인 듯 사람들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북새통을 이루며 열차를 타러 가고 있다.
"구정을 하루 앞둔 21일 서울역은 대한 추위를 무릅쓴 수많은 귀성객들로 붐볐다. 평상시 하루 3만명을 넘지 못하던 서울역 여객은 17일부터 4만 명 선을 지속, 20일엔 갑절인 8만명이 북적거려 구내가 몹시 붐볐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세월이 좀 더 흘러 1300만명이 본 영화 '서울의 봄'의 시대적 배경이 된 1979년. 당시 설 귀성 풍경도 196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12.12 군사반란'이 발생했던 그해 1월 22일 자 중앙일보 7면이다. 설 귀성 열차 예매가 시작된 22일 오전 서울역에서는 혼잡으로 3명, 버스표 예매가 시작된 여의도광장에는 인파로 인해 매표소가 부서지는 바람에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공휴일도 아닌 구정의 위력'이란 사진 제목이 눈에 띈다. 예매하려는 사람들이 빼곡히 몰려있는 서울역의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향을 향한 마음이 어찌 다를 수 있을까. 2000년대 들어 KTX가 뚫리고, 새 역사가 들어선 서울역에는 여전히 명절 때면 고향에 가기 위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다. 코로나 19로 열차표 예매 방식이 100% 비대면으로 바뀐 2020년 추석 이전까지 사람들은 표를 구하기 위해 밤새 줄을 섰다.
2007년 당시 설을 앞두고 귀성 열차 예매를 위해 전날 밤부터 담요를 덮고 서울역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모습(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예매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표를 사고 있는 2011년 당시 서울역 모습이다.
예전의 귀성 모습과 비교해 현재 가장 달라진 점은 표를 사기 위해 밤새 역사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명절 고향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밤샘도 불사하던 이용객들로 가득 찼던 서울역 풍경은 옛일이 됐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더 많은 시민이 열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명절 때면 온라인(인터넷,전화)예매와 오프라인 창구의 판매 비율을 조정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인터넷과 창구의 비율이 반반이었으나 점차 인터넷 판매 비율을 점차 늘려 2020년 설 당시 창구 판매는 20%만 진행했다. 같은 해 추석에는 코로나 19로 급기야 예매방식이 100% 비대면 판매로 진행됐고, 열차 내부에서도 창 측 좌석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인터넷 예매 시행 초기에는 예약, 결제 후 종이 승차권을 발권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으나 2010년부터 IT 모바일 기술의 발달로 스마트폰 승차권으로 전환됐다. '차표 한장'이 스마트폰 화면으로 변한 것이다.
올해 설 연휴를 앞둔 8일 '고향 가는 관문' 서울역을 찾았다. 반가운 가족을 만나러 갈 생각에 들뜬 표정의 시민들이 바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캐리어 가방과 선물 보따리를 양손에 든 모습에서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설빔을 곱게 차려입은 아이 손을 잡은 가족, 나 홀로 귀성길에 오른 시민, 반려견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모습 등이 보였다. 오전부터 대부분 노선의 승차권이 매진된 가운데 창구와 자동 발매기 앞에서는 입석표라도 구하려는 귀성객도 보였다.
부산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한 가족은 "아이가 둘이라 짐도 많고 힘들지만 오랜만에 가족들 만날 생각에 설렌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귀성객은 "올해는 경제가 어렵다 보니 선물 준비를 많이 못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과 즐겁게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설렘을 안고 떠나는 승강장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240만Km 무사고 운행 기록을 가진 39년 경력의 신승표 KTX 기장은 "자동차도 많지 않고 열차도 부족했던 시절 기차역은 전쟁터처럼 북새통이었다. 서울역은 물론이고 다른 역들에서도 몰려든 귀성객들이 무조건 기차에 올라타 열차 칸이 주저앉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다"며 "열차 창문을 넘어서 까지 밀려 드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지금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부모님 생각에 노인들을 조종칸에 모신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수십 년 동안 명절에는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신 기장은 철로 위 바뀐 명절 풍경에 대해 "이전에는 명절에 귀성객들이 선물 보따리들을 이고 지고 열차에 올랐는데, 요즘은 실용적인 선물로 바뀐 탓인지 짐꾸러미를 안고 열차에 오르는 모습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고무신, 달력에서 현금과 상품권으로 시대에 따라 선물은 바뀌었어도 가족을 생각하며 준비한 애틋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이번 설에는 200만 명이 넘는 귀성객들이 철도를 이용해 고향을 오갈 것으로 예상된다. 코레일은 이날부터 닷새간을 설 특별수송 기간으로 정하고 철도 이용객의 안전한 귀성·귀경길을 위해 특별교통대책본부를 24시간 운영한다. KTX 임시열차가 118회 추가 투입되고 공급 좌석은 평소보다 하루 2만 석을 늘려 5일간 총 171만 3000석을 확보했다.
오는 12일까지 이어지는 연휴에 승용차, 기차, 선박 등을 이용한 이동 인원은 2800만여 명으로 예상된다. 하루 평균 570만 명 정도가 이동하는 셈이다. 귀성은 9일 오전, 귀경은 11일 오후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강정현·장진영 기자(artjang@joongang.co.kr)
■ '여기서 잠깐'
「 떠나가는 새벽 열차, 그리고 10분 가락국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1959년 가수 안정애가 부른 ‘대전 브루스’노랫말의 한 부분이다. 지금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리되었지만, 과거에는 대전역에서 경부선과 호남선을 갈아타거나 급행열차와 완행열차를 갈아타는 일이 많았다. 노래에 등장한 새벽 열차는 대전역에서 호남선으로 철로를 바꿔야 했는데 기관차의 방향을 바꾸는 데는 10분이 걸렸다. 새벽의 허기짐은 7~8번 승강장의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달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탓에 국수를 "먹는다"라기보단 "후루룩 마신다"에 가까웠다. 이제는 대전역에서 10분의 정차가 주어지지 않는다. 승강장의 가락국수 판매대는 지난 1998년 철거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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