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본처에겐 데면데면, 젊은 첩 죽자 “훗날 자네 곁에…”

2024. 2. 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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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진압한 이시발의 사랑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자네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는가. 내 늘 자네에게 말했지, 나보다 열여섯 살 적으니 뒤에 죽어야 한다고. 자네는 또 ‘내가 먼저 죽길 원하오’라고 했지. 사생(死生)은 인연 따라 정해지고 명(命)에는 운수가 있다지만 자네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죽을 수 있단 말인가.”(제측실문·祭側室文)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 1569~ 1626)이 눈물로 쓴 아내 제문의 도입부다. 이시발은 문관이면서 병법에도 탁월하여 이괄의 난을 진압했고 후금(後金, 청나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남한산성 보수를 진행한 인물이다. 중국어(漢語)에 능통하여 군사·외교 대책을 기획하는 막중한 직책을 소화했다. 또한 이른 나이부터 각 도의 관찰사를 거치며 지방 행정의 역량을 보여주었고 병조참판을 지냈다. 이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는 죽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후손들 또한 고관대작에 오른 이가 많았다.

「 동갑 정실 민씨와는 애정 부족
첩 이씨는 재색 겸비한 이상형

이씨 죽자 눈물의 제문 직접 써
민씨 묘지명은 최립에게 부탁

후손들 민씨 곁에 이시발 묻어
지금과 다른 적서 관념의 단면

조선시대 사대부로서 아내의 죽음을 이렇게 애절하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제문의 주인공 이씨 부인은 네 번째 아이(딸)를 낳고 산후열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겨우 스물다섯인 그녀가 사경을 헤매던 날 평안도 관찰사인 마흔한 살의 남편은 의주에서 외국 사신을 응접하느라 몸을 뺄 수 없었다. 아내가 죽은 지 12일 만에 평양의 관아로 돌아온 남편은 간담(肝膽)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만남에서 사별에 이르기까지 부부의 10년 역사를 회상한다.

천재로 소문난 사임당의 손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이시발 무덤의 묘비. 아내 민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문장이 보인다(貞敬夫人驪興民氏祔左).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죽은 아내 이씨는 사임당의 손녀이자, 옥산 이우(1542~1609)의 서녀이다. 아버지 이우(李瑀)는 사임당의 화풍을 계승하여 시·서·화·금(琴)에 모두 능해 4절(四絶)이라 불렸는데, 딸 이씨가 이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은 다방면의 천재로 소문난 구미의 명문 규수 이씨에게, 아니 그 아버지 이우에게 반년을 매달린 끝에 허락을 얻어낸다.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거문고와 바둑 실력이 뛰어났으며 자수와 서화에도 능했다. 내 정이 자네에게 특별히 깊은 것은 어찌 재색의 아름다움에만 있겠는가.”(제측실문)

왼쪽이 이시발, 오른쪽이 정실 민씨의 무덤이다.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그런데 신부 이씨의 위치는 정실이 아닌 측실이었다. 조선사회는 처첩제(妻妾制)를 통해 일처(一妻)와 첩을 법적 가족으로 인정했는데, 그 안에는 또 복잡한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양반의 서녀로 태어나면 대개는 양반의 측실이 되었다. 옥산과 이시발 사이에 오간 글들을 보면, 젊은 나이에 방백(方伯, 각 도의 으뜸 벼슬)이 될 만큼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두 배나 많은 나이 때문인지 청혼을 거절하는 아버지의 고통이 느껴진다. 학술과 예술로 조선 최고의 가문이고 보면 까짓 권력에 홀려 측실의 자리에 딸을 내줄 리 만무했을 수도 있다.

제문은 이씨가 남긴 자녀들을 잘 돌보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아내 이씨는 외지로 도는 자신과 늘 함께 했는데(汝常隨余, 同我旅食), 여기 평양 관사에까지 이르렀다. 함께 옮겨 다니면서 아들 달아(達兒, 慶忠)와 민아(敏兒, 慶善)를 차례로 낳았고, 해아(海兒)를 낳았다. 그런데 해아는 병을 달고 있어 아내는 이 아이를 늘 걱정했는데 엄마가 죽고 며칠 후 해아가 뒤따라 죽었다. 그리고 갓 난 딸 가린(可憐)은 엄마 없이 살아날지 점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열 살 남짓한 두 아들 달아와 민아는 더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하여 어른으로 성장시키겠다며 남편은 굳게 다짐한다. 그리고 정리가 되는 대로 천릿길 고향으로 데려가 새 산소에 묻을 것이며 훗날 자신도 자네 곁에 묻히겠다고 한다.

아들들 활약에 훗날 이씨 정실 자격 얻어

벽오 이시발과 그의 측실 이씨 사이에 태어난 이경선을 기리는 충신정려문.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이씨의 장남 경충(慶忠, 1599~1648)은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를 따라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차남 경선(慶善, 1600~1636)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씨의 아들들은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서자의 굴레를 벗고 적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경주이씨세보』에는 이씨를 이시발의 배(配) ‘정경부인 덕수이씨’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녀 또한 아들들의 활약으로 정실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남편의 호를 따라 그녀를 ‘벽오부인’이라 불렀다. 작품으로 묵죽(墨竹) 4폭이 전해온다. 애정과 의리를 모두 구현한 벽오 부부의 이야기는 정실이나 측실을 떠나 진정성이 느껴진다.

조선의 가족제도에는 아내가 생존한 상황에서 다시 아내를 얻는 것, 양처병존(兩妻竝存)은 불법이었다. 고려의 다처제(多妻制)가 파생한 사회적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조선의 처첩제는 가부장제 가족의 다양한 욕망과 결합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파생했다. 처의 지위가 확고해서 합당한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혼은 불가능했다. 이를 보완하는 남자 쪽의 요구가 첩의 승인이다. 하지만 제도로 열려있다고 해서 모든 양반이 첩을 들였던 것은 아니다. 색을 밝히는 것으로 비칠까 봐 첩 장가에는 늘 자기변명이 따랐다. 벽오 이시발 역시 “후사를 얻으려고 자네를 측실로 맞았다(求嗣卜姓)”라고 하지만 이상형의 여성을 만난 것이다. 정실 민씨는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벽오 이시발과 그의 측실 이씨 사이에 태어난 이경선을 기리는 편액. 충북 진천 이시발 묘소 아래에 있다.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정실부인 민씨는 열아홉 동갑의 신랑을 만나 시집을 오는데, 처가 가족들은 남길만한 어떤 특징이 없었는지 이시발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후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혼인 11년에 남편이 다른 아내를 얻는데 그것도 ‘후사를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딸만 둔 서른 살의 그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녀는 측실이 아들을 낳자, 뒤이어 자신도 아들을 낳았고,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애정하던 측실이 여름에 죽자 그해 겨울 그녀도 죽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본처의 지독한 투기’로 읽힐 소지가 있다. 정실의 타이틀을 쥐긴 했지만 그녀는 늘 외로웠다. 이러한 추측은 민씨 부인 묘지명에서 어느 정도 사실화된다.

이시발은 부인 민씨의 제문을 직접 쓰지 않았다. 측실 이씨의 주검 앞에서 “오호애재(嗚呼哀哉)”를 연발하며 거의 쓰러질 듯 울부짖었고, 제문 말고도 여러 편의 애사(哀詞)를 남긴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아내 민씨가 죽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평양에 은거하고 있던 최립(1539~1612)에게 묘지명을 부탁한다. 남편 이시발이 부르고 최립이 기록한 ‘민씨묘지명(『簡易集』)’의 내용을 간추려보자.

“제 아내 민씨, 특기할 아름다움 없어”

측실 이씨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묵죽도.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제 아내 민씨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무슨 특기할 만한 아름다움은 없었습니다. 다만 부도(婦道)를 행하면서 집안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만은 대강 알았고, 모친께서 ‘나를 잘 섬기고 있으니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그런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혼인하고 몇 년 뒤 제가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진란이 터지자 모친을 찾아 저는 혼자 고향으로 내려갔고 전란의 와중에 서로 연락이 끊긴 나머지 생사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약간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後稍得之), 주변에 친정의 조모와 백숙부가 있는데도 민씨는 어린 딸을 데리고 시백부에게 의탁하였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제천 향리까지 왔기에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내를 공대(恭待)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1년도 되기 전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시발의 자필 서간(1601). [사진 경주 이씨 종친회, 진천 군청, 순천대 박물관]

아내와 어린 딸을 서울에 남겨두고 혼자 고향으로 내려가 어떻게 생사를 모를 지경이 될 수 있으며, 아내의 일을 “들어서 대강 알고 있다”는 식의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면 남과 다름이 없다. “이제 아내를 공대하기로” 한 남편의 태세 전환은 측실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전적으로 그 남편의 말에 따라 묘지명을 작성한 최립은 민씨를 가리켜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근본정신을 미루어 실천”하였고, “사군자의 행동과 다름이 없었다”는 논평으로 끝을 맺는다. 측실 이씨 곁에 묻히고자 한 이시발의 바람과는 반대로 후손들은 그를 정실 민씨 곁에 묻어주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제도와 이념으로만 재단한다면 중요한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태어나는 순간 승자팀과 패자팀으로 나뉘는 이런 구도에서는 어디에 속하든 삶의 온전한 의미를 구현하기 어렵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교만과 상처로 얼룩진 적서(嫡庶)의 유산은 청산되어야 한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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