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곤의 퍼스펙티브] 김정은의 ‘헤어질 결심’은 자기 방어적 패배 선언일 뿐
‘두 국가’ 선언한 북한의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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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불사 언급해 긴장 높이지만
한미 확장억제로 핵 효용 낮아져
미국 의식 중국은 북·러 선긋기
군 아니라 경제 우선만이 살길
」
국내 통일 단체들은 김정은의 발언에 당황하고 놀랐다. 이들은 김정은의 두 국가론이 남북관계를 파탄시키는 반통일적, 반민족적 행태라면서 북한에 정책 전환을 주문하기도 했다.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남북 긴장 고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북한이 김일성 시기부터 내려온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포기한 ‘김정은식 독립선언’은 결론적으로 자기방어적 패배 선언이다. 김정은이 자신감에 넘쳐, 이른바 강국 콤플렉스에 따라 공격적으로 노선을 전환했다는 주장을 자세히 뜯어보면 답이 나온다.
김정은의 강국 콤플렉스
핵과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이 자신감을 토대로 공세적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고 보는 공세론자들은 북한이 주도권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북한이 한국을 겨냥한 핵을 실전에 배치했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포함한 다양한 사거리의 미사일을 개발함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자신감을 갖게 됐으니 현실성 없는 고려연방제 따위의 통일론은 효용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 능력이 확장된 것은 분명하지만, 김정은이 체제의 종말을 각오하지 않는 한 핵을 먼저 사용할 수 없다. 북한은 핵을 재래식 무기와 섞어서 언제든지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관련 법을 만들기도 했다. 북한이 핵 사용을 강행한다면 미국의 막강한 핵전력 즉 핵우산으로 대규모 응징 보복을 받는 자살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이가 김정은일 것이다.
북한이 핵을 쓰면 정말 미국이 핵으로 대응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지난해 한·미 워싱턴 선언과 핵협의그룹(NCG)을 통한 확장억제가 제도화됐다. 이에 따라 한국의 독자 핵무장론의 주장도 힘을 잃게 됐다. 미국이 보유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 III는 발사 후 34분 만에 평양을 초토화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 미사일의 발사 움직임을 사전에 탐지할 능력이 없고, 발사한 미사일을 막을 요격미사일과 같은 방어 체계도 전무하다. 한·미는 한국의 재래식 전력과 미국의 핵전력을 함께 사용하는 ‘핵재래식통합작전’(Conventional & Nuclear Integration: CNI)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군사적 효과를 판단하기 어려우면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빠르다. 그런데 김정은의 입으로 불리는 김여정은 이미 미국의 확장 억제를 비판하는 담화를 수차례 발표했고, 김정은도 연말 연초 회의에서 정권 종말, 핵협의그루빠(그룹), 미국 핵전략 자산, 한미연합훈련, 일본과 한국의 군사적 결탁 등을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신경이 쓰인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확장 억제를 견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로 주도권 확보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핵의 효용성이 더욱 감소하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나는 상황이다.
신냉전은 북한의 ‘희망사항’일 뿐
북한 공세론의 두 번째 근거는 세계 질서의 변화와 연계된 신냉전의 도래다. 미국의 주도로 한·미·일의 협력 소위 남방 삼각관계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이에 맞서 북·중·러가 힘을 합쳐 대응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9월 연설을 통해 “제국주의 반동 세력에 의해 전 지구적 범위에서 ‘신냉전’ 구도가 현실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 러시아, 이란 등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가가 연대해 미국 주도의 1극 체제를 분쇄하고 다극 체제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게 김정은의 주장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 유난히 밀착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북·중·러를 한 축으로 하는 신냉전은 북한이 만들고 싶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최근 나타나는 북·중·러 협력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라기보다 ‘편의에 의한 결합’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의 협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조성된 일시적인 관계 증진일 가능성이 크다. 북·중·러 간에는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 정치 체제라는 특성과 미국을 적대시하는 인식 외에는 공유할 만한 가치나 공통점도 없다. 경제적으로도 상호 보완적이지 않다.
지난해 러시아와 관계를 다졌던 북한은 올해 수교 75주년을 맞는 중국과도 밀월을 유지하려 하지만 미묘함은 여전하다. 김정은이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에서 “조·로(북·러) 관계를 우리 대외정책에서 제1순으로 제일 최중대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은 중국에 보내는 압박 메시지로 들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북은 기정사실화된 반면 북·중 정상회담 이야기는 아직 없다. 비공개회의에 참석했던 중국 측 인사가 “북·중·러가 하나로 묶일 경우, 가장 불리한 것은 중국”이라고 한 발언은 북한 및 러시아와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중국의 고민을 보여준다. 중국은 북한·러시아와는 달리 현재 국제질서의 노골적인 파괴를 원하지 않고, 특히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라도 유럽 국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통일 담론 대체할 비전은 전무
북한 공세론 중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북한 신세대론’이다. 북한의 신세대인 ‘장마당 세대’는 물론 김정은·김여정도 선대(先代)와 달리 통일에 대한 ‘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다. 북한은 정권 출범 이래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 통일을 역사적 사명으로 선전해 왔지만, 김정은 남매는 통일론과 결별을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없다고 인식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북한이 그동안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온 통일론을 대체할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북한의 신세대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외부 문물과 사조에 익숙하다.
통일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경제발전론이지만 현재 북한의 상황으론 녹록지 않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무너진 지 오래다. “사(私)경제 종사율이 급격히 증가했고, 국가의 배급이 아닌 장마당 활동이 주된 소득원이 됐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통일부가 최근 발표한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조선노동당보다 더 센 당이 장마당”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북 주민 결속했던 통일론 무용해져
통일을 걷어낸 상태에서 경제상황도 마이너스의 길을 걷게 된다면 모든 책임은 김정은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2021년 8차 당 대회 때 공표한 2025년 말까지 북한 경제를 1.4배 성장시키도록 하겠다는 목표는 그 이행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김정은은 매년 4%대 성장을 제시했는데, 이를 위해선 지난해와 올해 두 자리 숫자의 경제 성장율을 달성해야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은 2021년 -0.1%, 2022년 -0.2%로 역성장했다.
결론적으로 김정은이 선포한 남북한 두 국가론과 통일 포기 선언은 패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북한 내에서 조직적인 반발이 당장 일어나진 않겠지만, 북한이 그동안 최상위 가치로 강조해온 통일·평화·민족을 근간으로 하는 ‘혁명’이 사라진 자리는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통일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이마저도 더는 할 수 없게 됐다. 김정은의 새 노선은 통일 대의에 익숙한 북한 주민들을 혼란으로 빠뜨릴 뿐만 아니라 남북간 체제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군사력 건설만으로 바깥 세상이 궁금한 북한 주민을 극장에 잡아둘 수 없다. 결국 선군(先軍)을 포기한 선경(先經) 만이 답이다. 김정은도 이를 잘 알기에 잠 못 드는 밤이 길어지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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