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의 시선] 중소기업은 왜 늘 어려운가
충청북도 청주에서 건축 사업을 하는 조모(53)씨는 두 달째 억대 공사대금을 못 받고 있다. 재하청으로 받은 일감인데, 발주처에 수차례 연락했지만 “자금 사정이 어려우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답뿐이었다. 설 연휴를 앞두고 돈 나갈 곳은 많은데 막막하기만 하다. 조씨는 “설 상여금은커녕 당장 이달 직원 3명에게 월급 줄 형편도 안 된다”고 말했다. 건설사는 “평소보다 보름가량 앞당겨 1차 하청업체에 대금을 지급했다”고 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앞두고 자금 사정이 빠듯한 협력업체에 대기업들이 납품대금을 보름가량 앞당겨 결제해준 지 20년이 넘었다. 이번 설에 주요 대기업은 협력회사에 9조2000억원을 조기 지급했다(한국경제인협회). 지난해보다 26% 늘었다. 하지만 조씨처럼 2~4차 협력업체로 그 온기가 제때 전달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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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 좋지만 작동 안 되는 동반성장
대기업 울타리 갇힌 채 도약 미진
닥치고 지원 아닌 ‘기술동맹’ 돼야
」
동반성장은 이명박 정부 3년 차 때인 2010년 국정 운영의 최우선 어젠다로 등장했다. 대기업들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했던 이명박 정부가 ‘상생 압박’으로 표변하자 적잖이 당황해했다. 여기에 더해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을 지낸 정운찬 전 총리가 “대기업의 초과이익에는 중소기업의 기여분도 있으니 보상해야 한다”며 ‘초과이익공유제’를 들고 나왔을 땐 뜨악했다. 이때 도입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권은 좌우로 바뀌었지만 동반성장 정책은 확대됐다. 경제민주화를 내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중소기업 대통령’을 자임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해소에 주력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납품단가 연동제가 도입됐다. 올해는 처음으로 ‘경제계 신년인사회’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리면서 중소기업계에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동반성장은 말은 따뜻한데 작동이 잘 안 된다. 대기업은 내심 ‘동반’을 부담스러워한다. 여전히 정부 주도에 끌려가는 모양새다. 정부나 중소기업계는 미흡하다고 불만이다.
이유가 뭘까.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다. 대기업은 가능하면 협력업체를 자신의 울타리에 가둬두려고 한다. 다른 경쟁사와 거래하는 것을 억제한다. 10여 년 전 인천의 한 협력업체를 방문한 대기업 회장이 이 업체 대표에게 한 말. “제품이 좋다. 계속 우리한테 공급해 달라. (납품 가격과 이익 배분은) 대기업이 10을 가져가면 중소기업도 1은 받아가야지.” 그 회장은 선의를 담아 말했겠지만, 중소기업체 사장은 ‘살려는 드릴게’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협력업체의 책임도 없지 않다. 도전보다는 제 자리에 안주하거나 ‘다른 주머니’ 만들 궁리를 한다. S기업은 주거래 은행과 함께 협력업체 저금리 대출을 알선해준다. 이자 중 일부는 대신 내주기도 한다. 물론 연구개발에 쓰라고 꽂아주는 돈이다. 그러나 회사 관계자는 “이 돈으로 사옥 짓거나 부동산 투자하는 업체도 꽤 되더라”고 전했다.
1차 협력업체보다 사정이 더 어려운 곳이 2~4차 협력업체들이다. 하지만 2~4차 협력업체 대상으로 동반성장을 강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장치도 없고, 의지도 약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K기업은 2차 중소협력사에 현금 결제를 하면 구매·조달 평가 때 가점을 줬다. 2차 협력사로 상생이 확산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사는 현재 이런 인센티브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다. 정부가 쌍심지를 켜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 주목받을 아이템을 ‘고안’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슬그머니 없앤 것이다.
규제나 사업 환경 때문에 성장을 기피한다는 ‘피터팬 신드롬’도 나타난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지난 2021년 말 기준 종업원 300인 이상 대기업은 4404개였다. 전체 기업 607만 개 중 0.07%다. 하지만 그 10년 전엔 0.09%(3334개)였다. 전체 사업체 수는 347만 개에서 607만 개로 두 배가 됐지만 대기업 비중은 뒷걸음질한 것이다. 중견기업 300곳 중 30.7%가 중소기업 회귀를 고민하고 있다는 설문 조사(대한상공회의소)도 있다.
동반성장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당연히 정부 보호막이 필요하다. 정부는 앞에서 예를 든 청주의 조씨한테도 ‘동반성장 햇볕’에 다다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다만 지난 10여년간 보호 중심의 정책이 중소 협력업체의 근본 경쟁력을 키웠는지 진지하게 분석해보자는 말이다. 더 중요한 건 ‘닥치고 지원’보다는 대기업과 기술 동맹을 통해 혁신으로 무장한 협력업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반도체 시장에서 ‘슈퍼을(乙)’로 불리는 ASML 같은 협력업체가 태어날 수 있다. 피터팬의 ‘닫힌 성장판’을 열어야 한다.
이상재 경제산업 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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