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마켓 나우] 유럽을 뒤흔드는 분노한 농심
예산 씀씀이를 보면 그 조직을 알 수 있다. 경제·정치블록 유럽연합(EU)은 예산의 70%를 농민과 회원국의 낙후지역 지원에 반반씩 쓴다. 그렇다면 EU는 왜 예산의 3분의 2 이상을 두 곳에 써야 할까? EU 27개국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의 기여분은 1.4%에 불과한데 말이다. 최초의 공동정책이 농민 지원이었기 때문이다.
1962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는 회원국 농민을 공동체 예산으로 지원하는 공동농업정책에 합의했다. 1980년대 말까지 EEC 예산의 3분의 2를 농민을 위해 썼다. 이후 30여년간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은 중동부 유럽 국가들이 EU에 가입하면서 낙후 지역 지원이 늘고 농민 몫은 줄게 됐다.
성난 농부들이 농민의 돈줄을 쥐고 있는 브뤼셀에 집결했다. 지난 1일 벨기에 수도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은 앞으로 4년간 500억 유로(약 70조 원)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회담장 바로 옆 룩셈부르크 광장에서는 수천 명의 농부가 1000대가 넘는 트랙터를 세워두고 경적을 울렸다. 정상들과 EU 집행위원회에 분노를 표출하며 지원을 압박했다. 이에 앞서 농민들은 지난달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고, 기후위기로 농산물 수확량이 급감했다. 값싼 우크라이나 농산물 수입으로 곡류 가격이 지난 1년간 10% 하락해 농부들은 곤궁해졌다. EU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만든다는 그린딜을 위해 농민들에게 각종 규제를 부과했다. 질소 배출량을 줄이겠다며 비료 사용량을 축소하게 했고 가축 사육도 줄이게 했다. 심상치 않은 농심에 화들짝 놀란 EU 집행위는 지원을 늘리겠다며 농민 단체와 대화를 시작했지만, 농민의 분노가 진정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전쟁이나 기후위기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농부들의 요구는 지속될 것이다.
유럽 정치권도 농심을 차지하려고 바쁘다. 오는 6월 6~9일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반이민과 반기후위기를 앞세운 극우 정당의 지지도가 상승세다. 이들은 그린딜에 반대하며 분노한 농민에게 표를 호소한다.
EU는 중남미 공동시장 메르코수르(Mercosur)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하기 위해 20여년간 공들였고 2019년엔 체결에 원칙상 합의했다. 그러나 최근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프랑스의 반대가 거세졌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산 값싼 농산물의 범람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FTA는 유럽 공산물과 메르코수르의 농산물을 맞교환하는 셈이라 유럽의 이익도 크기에 결국 정치적 해법이 필요하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지만 저성장에 신음 중인 유럽에선 이런 정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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