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가 이해인의 치밀한 설계가 발현하는 아름다움

윤정훈 2024. 2. 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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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 작은 정원부터 도시 단위 계획까지, 조경가 이해인이 자연을 이해하는 법.
「 LEE HAE IN 」
치밀한 설계가 발현하는 아름다움.
LH 가든쇼 시그니처 가든 ‘물의 기억’. 갯벌 표면을 형상화한 수경 시설은 검단 신도시가 지닌 땅의 기억을 감각적인 방식으로 소환한다.

Q : 도시공학과 도시계획학을 전공하고 조경설계가가 됐다. 당신을 조경으로 이끈 것은

A : 흔히 조경을 정원 디자인이나 식물을 다루는 일과 동일시하는데, 나에게 조경이란 공간을 계획하는 일이다. 건축이나 인테리어와 다른 점이라면 주로 외부 공간을 다룬다는 것이고, 도시계획과 다른 점이라면 자연과 생태를 생각의 중심에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이끌려 조경의 길로 들어섰다. 분야와 관계없이 다양한 기술을 차용해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 팀원 중엔 도시와 건축, 철학 등 조경이 아닌 분야를 공부한 이들도 많다.

Q : 조경설계사무소 HLD 공동대표로서 식물뿐 아니라 크고 작은 시설물을 활용해 아름다우면서도 짜임새 있는 공간을 만들어왔다. 디자인 원칙이 있다면

A : 땅과 조건에 따라 그때그때 맞는 해결책을 모색한다. 핵심적 · 결정적 개입을 뜻하는 ‘크리티컬 인터벤션(Critical Intervention)’을 디자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장식적 요소보다 철저한 연구에 기반한 디자인을 선호하고, 그 결과물이 특정 형태나 스타일로 읽히는 걸 경계한다.

수련의 잎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놓인 전주수목원의 생태습지원.

Q : 건물 앞 작은 정원부터 도로에서 건물 안으로 이르는 길, 너른 공원과 도시 단위 계획까지. 다양한 규모의 공간을 다뤄왔다.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면

A : 인천 검단 아라센트럴파크에 ‘물의 기억’이라는 이름의 정원을 조성했다. 본래 검단은 지척에 갯벌이 있었다. 현재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지금은 멀어진, 그러나 여전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갯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해안 사구를 모티프로 한 모래 정원, 이를 둘러싼 큰 조개 모양의 구조물, 갯벌 표면을 추상화한 분수로 이뤄졌는데 모두 갯벌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특히 분수의 바닥을 이루는 돌의 볼록한 정도를 세 가지로 다르게 구성했다. 이를 통해 규칙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갯벌 표면의 물 흐름을 재현했다. 곳곳에 숨은 노즐은 펄 속에 숨은 조개가 물을 내뱉듯 불규칙적으로 물을 쏘아 올린다. 사람들이 갯벌에서 만날 수 있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요소를 이곳에서도 발견하기 바랐다.

한강예술공원 ‘플로팅 가든’. 한강변에서 자라는 갖가지 들풀을 품은 레진 구슬은 한강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Q : 한강예술공원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플로팅 가든(Floating Garden)’으로 한강의 식물을 레진에 넣은 이색적인 시도를 했다

A : ‘물의 생명력’이라는 공모 주제에 따라 한강의 생명력을 생각해 봤다. 한강을 지날 때 나는 비릿한 냄새와 탁한 물을 부정하며 그럴듯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바라봐도 괜찮을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다 한강의 잡초를 떠올렸다. 저마다 특성과 이름이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심은 게 아니라 그저 잡초라고 불리는 것들. 이 식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번쯤 궁금해하길 바랐다.

서울용산국제학교 진입부.

Q : 안성에 조성한 LH 시그니처 가든은 획일화된 아파트 조경에 대한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

A : 석가산은 최근 아파트 단지에 공식처럼 답습된 조경 시설물이다. 그걸 대체해 보고 싶어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석가산의 크기와 위용을 강조하는 건설사 분양 광고가 그러하듯, 아파트를 주거공간이 아닌 부의 증식 수단으로 보는 시선 때문에 생긴 특이한 현상이다. 아파트에서 새 소리를 듣고, 물장구도 치고, 잔디 사이에 돋아난 민들레도 꺾고, 친구들과 언덕에서 구를 순 없을까? 이런 상상을 하며 이웃이나 가족과 추억을 쌓는 공간을 고민했다. 마을의 정자나무가 있는 언덕과 이를 따라 내려오는 개울, 잠시 머물기 좋은 작은 정원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미관을 해치는 옹벽을 미화하고 문주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등 경관을 개선하는 다양한 작업이 이뤄졌다.

Q : 기아자동차와 함께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브랜드 공간에서 조경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했나

A : 단지 외부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기보다 해당 브랜드의 가치관과 특성, 장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고 싶었다. 로고나 상품처럼 색과 형상을 반복한다고 공간이 브랜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랜드 공간에 조경이 ‘대지에 꽃꽂이하는’ 정도로 인식되는 건 안타까운 지점이다.

미관을 해치는 옹벽을 미화하고 문주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등 경관을 개선하는 다양한 작업이 이뤄졌다.

Q : 공간에서 자연을 다룰 때 중요한 점은

A : 자연에 대한 이해도. 자연을 피상적으로 알면 그것을 선호하는 양상 역시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조화나 인조암으로 만든 석가산, 돌 모양의 스피커, 인조 잔디와 같이 단순히 ‘자연을 흉내 낸 것’도 쉽게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을 깊고 다각적으로 이해해야 구체적인 특징을 잘 활용하고 대중의 취향도 선도할 수 있다.

기아자동차 브랜드 체험 공간 기아 비트360. 가족, 캠핑, 아웃도어, 오프로드, 탐험과 같은 키워드에서 파생한 ‘숲 경관’을 SUV 전시 공간의 콘셉트로 정해 디자인했다.

Q : 동기와 영감이 되는 것

A : 서울시와 녹지생태도심을 만드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데 ‘개방형 녹지’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를 유도할 예정이다. 덕분에 엄청난 리서치를 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하고 방대하지만 보람 있다. ‘지금 제대로 안 하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동력이 될 때가 많다. 영감이 되는 것을 꼽자면 ‘새’랄까. 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벌레부터 잎의 구조와 흙, 사람, 심지어 돈의 흐름과 정치도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지표와 같다.

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
새로 출시된 전기차를 홍보하는 전시공간 조성의 일환으로 주차장을 매력적인 도심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새로 출시된 전기차를 홍보하는 전시공간 조성의 일환으로 주차장을 매력적인 도심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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