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언니의 반란, 명절에 양가 대신 여행 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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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 기자]
▲ 설 연휴를 이틀 앞뒀던 지난해 1월 19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이 인파로 붐비는 모습(자료사진). |
ⓒ 연합뉴스 |
이번 설연휴 인천공항에 100만 명이 몰린다는 뉴스를 접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많은 수치라고 한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볼 이유가 없는 솔로임에도 명절엔 집으로 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명절 연휴 공항에 운집하는 여행자들 소식을 접할 때면 관습을 거스르는 용기에 알 수 없는 동경을 했다.
몇 년째 명절날 집에 가지 않는 솔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집에서 호적판다는 말까지 나왔다면서도 별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집에 왜 안 가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가면 잔소리를 한다고 했다, 결혼하라고. 그래서 혼자 여행을 한다고 했다.
우리 집은 그런 명절 잔소리도 없고, 내가 여행 간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 싱거울 정도인데 명절만 되면 모범생처럼 으레 집으로 향한다. 오로지 내 의지지만, 언젠가는 나도 한번 명절에 반항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늘 생각뿐이다. 중력처럼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역행할 무엇이 내게는 아직 없다.
나를 두 세 번 놀라게 하는 언니의 모습
책상 위 달력만 보며 명절 일정을 조율 중인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설연휴 때 가족여행을 갈 거라며 제주도 항공권과 숙소를 알아봐 달라는 갑작스러운 부탁이다. 놀랍고 당황스러워서 재차 물었지만 대답은 확고했다. 처음 있는 반란이다. 명절여행이라니. 예약금을 보내라고 하면 마음이 변할까 했지만 언니는 망설임도 없이 거금을 보내와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할 수 없이 항공권을 구매하려 온라인에서 손가락품을 열심히 팔았지만 연휴 일주일 전이라 쉽지 않았다. 항공권이 없으면 포기하겠지 했는데 언니는 행선지를 바꿔 강원도 한 도시를 지목하며 숙소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언니는 그저 어디든 명절 연휴 때 집을 벗어나고픈 사람처럼 보였다. 무조건 숙소를 잡아달라고 부탁 아닌 애원을 했다. 간절하게.
과거 잠시 여행사에 근무한 적은 있었지만 나 역시 여행을 안 간 지 십 년이 넘었고 국내여행은 거의 다니질 않았으니 잘 모르지만 언니가 처음 한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믿기지 않는 명절여행을 택한 충동적인 상황이라 반신반의했지만 인터넷 검색을 하면 숙소쯤이야 어렵지 않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60 평생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언니의 행동에 그저 어안이 벙벙 놀라울 따름이었다.
언니가 원하는 조건에 맞춰 최저가를 약속하는 숙소 몇 개를 추리고 크로스 체크를 해서 겨우 숙소 하나를 예약했다. 아무리 최저가라지만 연휴라 그런지 평소보다 비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옵션과 혜택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온라인 예약 시 발생할 수 있는 혹시 모를 변수를 고려해 숙소에 전화했다. 최저가를 찾아 삼만리 투어 하다 눈과 손가락이 힘들었던 꼬박 하루가 걸린 숙소 예약이다. 언니에게 무료 취소 가능한 기간을 알려줬더니 취소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 제주도 한번 안 가본 언니가 이렇게 갑자기 명절 연휴에 충동적인 여행이라니. 진심으로 응원을 보냈다.(자료사진) |
ⓒ 픽사베이 |
친정과 시댁, 양가를 모두 배제한 언니의 이번 명절여행은 충동을 가장한 형태였지만 어쩌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은 소망이었을지 모른다. 그동안 삶에 얽매여 제대로 된 여행 한번 해본 적 없는 언니다. 여행이라야 고작 친구들 모임, 어쩌다 간 일본여행이 전부라 여행은 늘 꿈만 꾸는 것이었다. 그런 언니가 어떨 땐 안쓰럽기도 했다.
자발적 '집콕'을 하는 나와는 반대로 언니는 늘 어딘가를 향하고 싶어 했다. 전업 주부들이 그렇듯 우울함이 지배할 때가 있지만 제대로 된 출구가 없었다. 언니와 수다를 떠는 것으로 일상을 공유하며 기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언니가 명절여행을 앞두고 예전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명절여행을 결심한 이유를 따로 묻지 않았지만 짐작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행복해야 할 명절이 숨이 턱턱 막힌다면 명절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라져야 하는 것들 중 하나로 명절 증후군을 뽑고 싶다. 짧지 않은 생. 명절연휴를 어떻게 보내던 각자의 선택이지만 행복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언니, 여행 갈 생각 하니까 기분 좋은가 보다"라고 묻자 "그럼!" 언니는 여행 날짜를 기다리는 순간순간이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해하는 언니를 보니 괜히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언니랑 한 번도 여행을 한 적이 없다.
언니의 여행 루트를 짜다 보니 나도 여행이 가고 싶어 져서 호텔을 찾아 '호캉스' 예약을 했다. 관광이 아닌 그저 휴식이 필요하다고 한 언니에게도 딱 안성맞춤인 투어다. "언니, 명절 지나고 다음 달엔 나랑 호캉스 갈래? 근데 나랑 가려면 기차 타고 가야 돼"라고 했더니 흔쾌히 언니 왈 "기차도 한번 타보지 뭐" 이런다.
그럼 매달 한 번씩 가자고 했더니 금세 현실로 돌아온다. "어우, 그럼 돈 많이 들 텐데"면서. 내가 "걱정 마, 숙박비는 내가 낼게" 했더니, 알았다고 하며 좋아라 한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닌데. 올해엔 언니와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해봐야겠다. 다음엔 동생도 데려가봐야겠다. 여행이라는 게 어떤 기념일에만 간다고들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는 그날이 기념일인 것 아닌가.
이렇게 근 10년 만에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소확행' 시동을 걸어본다. 언니의 명절 여행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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