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론은 현실에 없다”… 독창적인 생활사 연구 보고서
샹뱌오 지음, 박우 옮김
글항아리, 896쪽, 3만9000원
‘경계를 넘는 공동체’는 중국 인류학자 샹뱌오(Xiang Biao·52)의 책으로는 두 번째로 국내에 소개된다. 지난 2022년 샹뱌오의 대담집 ‘주변의 상실’이 번역돼 자기, 주변, 생활, 로컬 등을 키워드로 한 샹뱌오의 독창적 학문이 주목을 받았다. 중국 동남부 저장성의 농촌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베이징에 형성한 집거지인 ‘저장촌’을 다룬 ‘경계를 넘는 공동체’는 샹뱌오의 주저다. 이 연구로 샹뱌오는 2005년 영국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교수에 임용됐고, 2021년부터 독일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책은 저장촌에 대한 장기간의 현장조사를 기반으로 집필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저장촌의 형성, 확장, 굴절, 재도약의 과정을 서술한다. 저장촌 사회와 경제의 중심에는 의류 산업이 있다. 샹뱌오는 가내 수공업과 불법 매대로 시작된 저장촌의 의류업이 10만명의 지역 공동체로 발전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또 남부 중국의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농촌 공동체 구성원들이 베이징이라는 대도시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주민 공동체에 대한 연구가 새로울 건 없다. 하지만 샹뱌오가 저장촌 연구에서 발견해낸 개념들은 매우 독창적이고 구체적이며, 사람과 집단의 실제 행동 논리를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여 자신의 경제적 행위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샹뱌오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저장촌에 머물며 조사한 것이 이 한 문장에 요약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장촌의 발전에 결정적인 하나의 핵심적인 연결고리는 없을까? 나는 행위의 새로운 단위를 발견했다. 나는 이것을 ‘계(系)’라고 부른다. 계는 한 명의 행위자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관계의 조합으로서 ‘관계총(關系叢)’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에 따르면, 저장촌에서 하나의 계는 두 개의 아계를 포함하고 있다. 한쪽은 친우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친우권’, 다른 한쪽은 사업적 협력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업권’이다. 그는 친우권과 사업권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라며, 계를 “사람들의 일상행위의 주요한 단위이자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기반”이라고 규정한다.
중국에서 ‘꽌시’라고 말하는 관계의 중요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관계는 보통 두 개의 점(행위자) 사이의 연결로 이해된다. 하지만 샹뱌오는 저장촌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들을 분석하며 관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그는 이미 존재하는 많은 관계를 동반한다. 당신의 관계망과 나의 관계망이 어떤 관계인지가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의 본질이다.”
사회적 관계를 사람들의 일생활의 단위로, 경제적 행위의 기반으로, 초보적 공공성의 매개로 파악한 샹뱌오의 연구는 사회과학이 상정하는 핵심 개념들을 뒤흔든다. 그는 현재 사회과학은 “사람을 독립된 원자로 간주하고 완전한 자주적 행동 능력과 자주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며 “하지만 나는 중국 사람으로서, 나의 삶에 대한 관찰과 반성을 통해 사회생활을 이해할 때… 사람은 통일되고 일관된 이익과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고 통일된 명확한 경계도 없다”고 말한다.
또 호혜, 쌍방향성, 교환 등의 개념은 사회학과 인류학 이론의 주류 용어인데, 이는 사람의 실제 일상 행동과는 거리가 있고 사람들 행동의 진짜 논리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저장촌에서 관찰한 이주민 사이의 도움은 개인에 대한 호혜나 쌍방향성, 교환 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며 “도움이 본질적으로 자신이 처한 관계총에 투자하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샹뱌오는 “우리가 상상하고 이론으로 규정하는 현실은 없다”고 강조한다. 또 전통과 현대, 농촌과 도시, 특수와 보편, 개인과 구조 등 대립하는 개념들 사이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 같은 경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행위자는 관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구성된다.” 그리고 “집단은 그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지며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샹뱌오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통해 현대 중국인들의 실제 모습을 보게 하고, 사회과학의 추상적 관습에 충격을 가한다. 샹뱌오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때 점점 더 추상적인 개념에 의존하는 반면,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면서 “나는 장기간의 관찰만이 사실의 미세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유일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고 썼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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