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간의 수수께끼’… 고대 한국어 비밀을 푼다
향문천 지음
김영사, 400쪽, 1만9800원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라는 부제가 눈길을 끈다. 고대 한국사가 그렇듯 고대 한국어는 수많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다.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한국어가 고대 어느 나라의 말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른다. 20세기 이후 현대 한국어는 고려 시대 개경에서 사용되었던 중세 한국어(10∼16세기 한국어)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면 중세 한국어와 직결된 고대 한국어는 무엇이었을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서라벌 중심의 후기 신라어가 한반도 전역을 통일했고 중세 한국어로 이어진 것일까?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에서는 후기 신라어에서 발생한 ‘ㄹ’이 ‘ㄴ’으로 비음화된 변화 등 최소 두 가지 개신(改新)이 중세 한국어에 계승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신라어가 한국어의 조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음운, 문법, 어휘 등 언어적 요소의 변화를 말하는 개신은 언어의 흉터 같은 것으로, 중세 한국어가 후기 신라어를 직접적으로 계승했다면 후기 신라어의 개신이 중세 한국어에서도 관찰돼야 한다.
저자는 중세 한국어가 “후기 신라어가 사용되었던 한반도 동남 지방이 아닌, 오랜 기간 고구려와 백제가 차지했던 중부 지방의 언어에서 유래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면서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 확립된 한국어의 뿌리는 어쩌면 고구려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본다.
“일본어는 백제어의 후예”라는 얘기도 흔한데, 이것은 맞는 말일까? 저자는 “백제어가 정말로 일본어와 친연 관계(복수의 언어가 갖는 계통적·유전적 연관성)에 있다면, 둘 사이에 많은 동원어(공통된 기원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단어쌍)가 있어야 하고, 동원어 간에 규칙적인 음운대응이 관찰돼야” 하지만 백제어와 일본어 사이에서는 동원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 일본어가 백제어로부터 많은 어휘를 차용한 것은 맞다”며 “하지만 차용어는 계통적 동원어가 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책은 이밖에도 韓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자칭이 되었을까, 현대 한국어의 ‘물’이나 ‘메(산)’를 고대 한국어에서는 뭐라고 발음했을까, ‘서울’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기원했을까, ‘코리아’라는 국가 명칭은 어떻게 서양으로 퍼졌을까 등 흥미로운 질문들을 다룬다. 저자는 “고대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언어 접촉은 한국어사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베일에 싸인 고대 한국어의 난제를 해결할 중요한 실마리”라며 인접 지역·국가와의 접촉이나 교류에 초점을 맞춰 고대 한국어의 비밀을 추적한다. 당시 중국어와 일본어는 물론 북방의 여진어, 거란어, 만주어, 몽골어 등을 통해 이들과 접촉한 고대 한국어의 계통과 발음, 변화 등을 밝히는 한편 언어 사이에서 발견되는 어휘의 유사성은 동일한 기원 때문이 아니라 차용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한국어가 북방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분류를 “현재로서는 증명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백제어, 고구려어, 신라어로 구성된 고유한 한국어족을 상정한다. 그리고 이 한국어족 집단의 원형을 서기전 3세기 한반도로 이주한 요동의 고조선 세력이라고 본다.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세력이 존재했고 요동 문명에 속했던 고조선은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한반도로 내몰려 금강 지역으로 이주했다.
책은 한국어에 남아 있는 인접 문명과의 접촉·교류사를 풍부하게 드러낸다. ‘Korea’라는 명칭이 서양 언어에 유입된 과정을 살피다 보면 조선인들이 일본 류쿠를 거쳐 말레이시아에 가서 서양과 교역했을 가능성이 나타나는 식이다.
유럽 문헌에서 Korea와 직접 관련이 있는 단어는 네덜란드 역사가 얀 하위헌 판 린스호턴의 ‘여행기’에서 ‘Insula de Core’(코레 섬)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래서 린스호턴이 만난 중국인들이 말하는 ‘고려’ 발음을 듣고 적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린스호턴은 중국 본토를 방문한 적이 없으며, 동방무역 거점이었던 인도 고아에서 거류하며 중국 푸젠성 출신 상인들과 접촉했을 수는 있다. 그렇게 보더라도 지금의 푸젠성에서 사용되는 현대 민난어에서는 고려를 ‘골레’라고 발음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저자는 16세기 초 포르투갈 문헌에 등장하는 ‘Gores(고레스)’라는 단어를 검토한다. ‘고레스’는 말레이시아 믈라카 등지에 내항해 교역했던 일본 류큐왕국 사람들의 명칭이었는데, 한반도에서 류쿠를 경유해 국제무역에 나선 조선인들을 가리키는 ‘고려’의 와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언어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어 기원과 계통을 둘러싼 오해를 바로잡고, 한국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의 접촉과 교류사를 서술한다. 저자는 17만여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향문천’에서 언어와 관련한 콘텐츠를 연재하고 있다. ‘언어덕후’ ‘언어천재’라고 불리는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얼굴과 이름은 물론 직업이나 학문적 배경도 밝히지 않는다.
지난 6일 전화 통화에서 저자는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거주하며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익혔고 역사언어학에 관심을 가진 애호가들과 커뮤니티를 구성해 공부해왔다고 말했다. 또 책에 쓴 내용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그간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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