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이 환호한 윤 대통령 발언... 우리 국민만 서글프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KBS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전범기업 이외의 한일 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성금이나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말한 것은 이와 거리가 있다. 그가 말한 것은 행정안전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떠안고 기업 후원금 등을 바탕으로 피해자나 유족에게 금전을 지급하는 형태(제3자 변제)와 관련이 있다. 전범기업에 대한 피해자의 청구를 곤란케 하는 이런 방향의 금전 지급에 기업들이 동참해 주기를 기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대법원은 피해자에 대한 후원이나 지원이 아닌 배상을 명령했고, 그것을 전범기업에 명령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발언은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이 아닌 일반기업들의 지원금을 받도록 유도하는 것에 가깝다. 가해자의 배상 없이는 피해자의 한이 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문제 해결과 동떨어진 발언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
ⓒ 유성호 |
윤 대통령은 전범기업이 아닌 제3의 기업들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부각시키는 한편, 불법성이 명확한 배상 대신에 그것이 모호한 보상 방식을 제시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이것을 배상으로 가는 건 맞지 않다고 해서 6700억 정도 예산을 마련해서 보상을 해줬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법률가가 많이 포진한 정부다. 이런 곳에서 노무현 정부가 배상 아닌 보상을 선택했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은 실수이기보다는 고의로 볼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12월 10일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희생자 지원법)' 제1조는 이 법의 제정 목적이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하는 데 있다고 규정했다.
이 법률에 의한 지원이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떠안는 것인지, 아니면 이와 무관한 것인지를 가장 유권적으로 판단해 줄 수 있는 주체는 대통령이 아닌 법원이다. 2018년 10월 30일에 신일철주금(일본제철)을 상대로 역사적인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내릴 때 대법원은 이렇게 판시했다.
"대한민국은 2007년 희생자 지원법 등을 통해 이른바 강제동원 희생자에게 위로금이나 지원금을 지급하기는 하였으나, 해당 법률에서 그 명목이 인도적 차원의 것임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조치는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 자금으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자에 대하여 법적인 지급 의무를 부담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법원은 희생자 지원법상의 금전 지급이 자국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차원이라고 못을 박았다. 가해자의 배상 책임을 소각해주는 게 아니라,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의무에 기인한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그런 뒤 희생자 지원법에 반영된 노무현 정부의 인식을 정리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속에 개인 위자료 청구권은 포함돼 있지 않으며 대한민국은 피해자에게 법적 배상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이 위 지원법의 기본 인식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는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떠안겠다는 입장을 2023년 3월 6일의 제3자 변제방안 발표 때 표명하고, 피해자에 대한 금전 지급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그런 생각으로 피해자들을 지원한 게 아니라 자국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위 대법원 판결의 인식이다.
이 판결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지원은 1965년 청구권협정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청구권협정과도 무관하고 식민지배책임과도 무관하다면, 배상이니 보상이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불법적이든 아니든 손해 발생에 대해 책임이 있어야 배상이나 보상을 논할 수 있으므로, 노무현 정부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책임은 물론이고 보상책임도 떠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가 '배상은 맞지 않다'는 판단하에 보상을 해줬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이미 끝났다는 일본 측 주장에 동조하는, 사실과 다른 발언을 했던 것이다.
강제징용에 관한 그의 대담 발언은 일견 모순돼 보인다. "배상 판결은 더 이상 논란이 필요 없는 사법부 최종심에서 나온 판결"이라고 말했다. 가해자가 배상책임을 이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확인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범기업이 아닌 일반 기업의 지원'과 '배상이 아닌 보상 방식의 지원'에 무게를 싣는 발언을 함께 내놓았다.
발언 끝에 나온 "판결이 앞으로 어떻게 선고되는지와 상관없이 한일관계는 이제 복원이 됐고 미래를 향해서 지금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발언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는 건지 아닌지 단언하기 힘들다. 그래서 '논란의 여지 없는 판결' 부분과 '기업의 지원 및 보상' 부분이 상호 충돌된다고 할 수 있다.
▲ 지지통신의 8일 자 기사 '기시다 수상은 정직하며 성실, 전 징용공 해결에 기업의 협력 기대 ? 한국 대통령(岸田首相は「正直で誠?」 元?用工解決で企業の協力期待―韓?大統領)' 캡처 |
ⓒ 지지통신 홈페이지 |
상호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가 함께 나열된 경우에는, 말하는 이가 방점을 찍은 데로 눈길이 가기 쉽다. 윤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이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언뜻 들으면 그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표적 통신사들은 윤 대통령이 강조점을 찍지 않은 부분에 주목했다. 이에 관한 7일 자 서울발 <교도통신> 기사 제목은 "윤 대통령, '일한기업이 협력을'(尹大統領 日韓企業が協力を)"이다. '대법원 판결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부분이 아니라 '한일 기업들의 갹출금으로 해결되리라 기대한다'는 부분에 무게를 실은 보도다.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7일 방송된 공영방송 KBS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전 징용공 소송문제와 관련해, 해결을 위해 '한일관계의 개선을 원하는 양국의 기업인의 협력'을 호소했다."
윤 대통령은 양국 기업이 협조하리라는 기대감을 표시했지, 협조해달라고 호소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교도통신> 서울 특파원에게는 그것이 호소로 들렸던 모양이다.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부정하는 것이 윤 대통령의 진의로 비쳤기에 이런 보도가 나왔으리라 볼 수 있다.
<교도통신> 특파원만 그렇게 들은 게 아니다. 8일자 서울발 <지지통신> 보도는 윤 대통령에 대해 좀더 우호적이다. <지지통신> 기사의 제목은 '기시다 수상은 정직하며 성실, 전 징용공 해결에 기업의 협력 기대 – 한국 대통령(岸田首相は「正直で誠実」 元徴用工解決で企業の協力期待―韓国大統領)'이다.
이 기사는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기업 지원에 의한 해결 방식에 희망을 표시했다고 한 뒤, 위의 '향후 판결에 상관없이' 부분도 일본에 유리하게 해석했다. 기사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의한 제3자 변제 방식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윤씨는 '판결에 관계없이 일본과의 관계는 복구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대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윤석열 정부는 재단을 내세워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것이라는 의미로 그 부분을 이해한 듯하다. 일본 쪽이 볼 때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자국에 유리하게 비쳤기에 이런 보도들이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일 간의 미묘한 현안과 관련해 일본 측에 유리한 발언을 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 좋다 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소신에 부합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항상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도 배상이 아닌 보상 방식을 선호했다는 말로써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가해자 일본에게 힘을 실어주는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서글프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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