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더 쓸쓸했는데…" 고시촌 중년男 울린 떡국 한 그릇 [르포]
“OO씨 허리는 어때? 알려준 운동은 좀 했어요?”
“OO 할아버지, 치아 안 좋으니까 부드러운 빵 하나 더 드릴게요.”
설 연휴를 이틀 앞둔 7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 골목에서 170여 명의 이름이 다정하게 불렸다. 과거 십수 년 고시 공부를 하다가 결국 포기한 고시 낭인(浪人)이거나, 저렴한 월세 등을 이유로 홀로 고시촌에 들어와 정착한 중·장년 남성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시민단체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이 나눠주는 무료 점심 도시락을 먹기 위해 모였다. 6년 전부터 가족과 왕래가 끊겼다는 조모(66)씨는 “평소에도 쓸쓸하지만 명절엔 특히 더 외롭다”며 “들을 일 없는 내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니 새 가족이 생긴 것 같아 큰 힘이 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2013년 이재을(69)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가 만든 사단법인 길벗사랑공동체는 지난 2017년 사법고시가 폐지될 무렵 생활고를 겪는 고시생 지원 활동을 하던 박보아 대표와 만나 지금의 ‘해피인’으로 발전했다. 박 대표는 “초창기엔 60대 남성 서른 명 남짓이 도시락을 받아갔는데 코로나19 유행 이후 100명 이상 늘었다”며 “한창 일하던 40~50대 남성들이 실직한 뒤 대거 몰려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두꺼운 점퍼를 입은 중·장년 남성 등이 모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 열 명의 눈과 손은 쉴 틈 없이 분주히 움직였다. 6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가스레인지 두 구만으로 대량을 조리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이들은 미소와 활기를 잃지 않았다. 수개월째 봉사를 해온 한 자원봉사자는 “요리할 땐 불편하더라도 밝은색 옷을 입고 온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따뜻한 나날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해피인은 보통 주 3회 하루 평균 총 130인분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날은 40인분을 더 만들었다. 설 명절 동안 문을 닫기 때문이다. 떡국과 전 같은 명절 음식을 담은 일회용 도시락과 빵, 컵라면, 즉석밥 등이 담긴 꾸러미도 함께 건넸다. 이날 도시락 170인분은 1시간 30분 만에 모두 동났다.
이날의 손님 열 명 중 한 명 정도는 여성이었다. 30분 기다린 끝에 1등으로 도시락을 받았다는 김모(62·여)씨는 “사기당한 뒤 갈 곳이 없어 대학동 고시원에 들어오게 됐다”며 “처음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마저 했는데 이곳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 온기 덕에 맘이 편해져 살도 3㎏이나 쪘다”고 말했다.
혼자 사는 이들에게 해피인은 끼니 해결을 넘어 독거인들에게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도 있다. 해피인이 관리하는 1인 가구는 약 500명에 달한다. 이 중 400여 명은 최근 한 달 사이 한 번 이상 도시락을 받아가며 ‘안부 체크’를 했다. 145명이 함께하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선 서로 근황을 묻는 등 활발하게 소통한다.
1990년대 행정고시에서 수차례 고배를 마셨던 이모(56)씨는 결혼 후 시험에 재도전하기 위해 다시 대학동에 들어왔다. 하지만 계속 시험에 떨어지면서 고시촌에 홀로 산 지 올해로 17년째다. 그는 “밥을 못 먹어서라기보다 사람 만나서 얘기하려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8년 전부터 고시촌에 혼자 사는 장모(68)씨도 “여기는 인생의 가장 안 좋은 시기에 쏟아진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며 “지금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지만 2~3년 안에 재기해서 해피인에 꼭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인구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대학동에는 1만 7484세대가 살고 있다. 이 가운데 1인 가구가 1만 3608세대(77.8%)로 가장 많다. 대학동 1인 가구 중 70~80%는 중·장년층 남성이라고 박 대표는 추정한다.
고독사가 매년 늘고 있는 가운데 특히 독거 중·장년층은 고독사 위험군으로 분류된다. 2022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고독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7~2021년 고독사 발생 건수는 총 1만 5066건으로, 5년 새 연평균 8.8%씩 증가했다. 이 중 남성이 여성보다 5배 이상 많았고, 나이로는 50대, 60대, 40대 순으로 많았다.
40~60대 남성 1인 가구의 경우 비혼과 이혼 등 가족 해체에 실직까지 겹치며 사회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식사를 챙기는 가사 노동이나 건강 관리에 있어서 여성보다 취약한 편이기 때문이다.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사회에서 실패한 뒤 은둔하는 중·장년은 빈곤 노인층이 되기 쉽다”며 “유기적인 사회적 돌봄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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