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시간 제약 없애니 출산율 ↑…'韓 닮은 꼴' 日, 기업이 핵심 짚었다[K인구전략]
이토추상사, 근무방식 개혁에 여직원 출산율 2명 육박
NTT, 전면 원격근무 도입에 단시간 근무 감소
히타치, 예비부모 교육 후 '아빠 육휴' 비율 두 배 뛰어
'눈치' 문제, 동료에 수당 지급해 해결
편집자주 - 대한민국 인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기업에 있다. 남녀 구분 없이 일로 평가하는 기업 내 분위기와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곧 K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적어도 일터에서의 부담감이 걸림돌이 돼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아경제는 가족친화 정책을 선도하는 기업을 찾아가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지점을 짚고,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기업과는 다각도에서 함께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기업부터 변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분석한다. 금전적 지원보다 심리적 부채감을 줄여주는 회사의 문화와 분위기가 핵심이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다양한 측면에서의 대안을 제시한다.
"‘아침형 근무’를 통한 전 직원의 근무 방식 개혁이 결과적으로 여성 직원의 활약을 뒷받침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여성 직원이 출산 후에도 경력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게 됐지요."
일본의 3대 종합 상사인 이토추상사가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고백한 내용이다. 최근 10년 새 여성 직원의 출산율을 대폭 끌어올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자 지난해 개혁 과정을 설명하며 내놓은 말이었다. 이토추상사의 여성 직원 합계 출산율은 2012년 0.6명에서 2021년 1.97명으로 대폭 상승했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자 2013년 오후 8시 이후 불필요한 야근을 없애고 아침형 근무제를 도입한 것이 출산율 상승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같은 기간 이토추상사의 노동 생산성도 5배 이상 올랐다.
한국만큼이나 저출산 문제 해결에 고민이 큰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가임기 여성의 합계 출산율이 1.57명을 기록한 1989년 ‘1.57 쇼크’를 통해 저출산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난 30여년간 인구 감소 문제 해결을 위해 달려왔다. 그럼에도 일본의 2022년 합계 출산율은 1.26명으로 여전히 낮고 인력 부족 우려도 큰 상황이다. 저출산의 원인으로 꼽히는 장시간 노동, 여성에 쏠린 육아·가사 부담, 임신·출산·육아를 바라보는 직장 내 부정적인 시선까지 일본 워킹맘·대디의 고통은 한국과 꽤 닮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토추상사가 내놓은 성과는 그야말로 ‘기적’으로 평가받는다. 이토추상사뿐 아니라 일본의 주요 기업들은 직원의 일·가정 양립을 핵심 과제로 두고 있다. 여성 인력과 맞벌이 부부 증가라는 시대 변화에 맞춰 유연근무제, 남성 육아휴직 확대 등을 도입, 생산성을 높이고 인재를 확보하는 데 공을 들이겠다는 전략이다.
이토추, 10년간 일하는 시간의 ‘틀’ 깼다이토추상사가 추진한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근무 시간의 틀을 흔드는 데서 시작됐다. 이토추상사에 따르면 이 회사는 11년 전 노동 생산성 개혁 차원에서 오후 8시 이후 야근을 없앴다. 대신 오전 5~8시에 출근하도록 했다. 아침형 근무를 통해 추가 업무가 없어도 눈치 보느라 야근하던 문화를 없애버린 것이다. 제도 시작 초기에는 인사총무부가 오후 8시에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소등에 나섰고 "일 다 못 끝내면 책임질 거냐"라는 항의를 듣곤 했다고 한다. 몇 달간 이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10년이 지난 지금 임직원의 인식 변화가 이뤄졌다.
제도 도입 10년 만인 2022년 이토추상사는 기존 아침형 근무에 출퇴근 시간을 비교적 유연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아침형 플렉스 타임제’를 도입, 새벽 근무 시간에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새벽 근무 수당은 야근 수당과 동일하게 25% 할증 지급했다. 당초에는 어려웠던 오후 조기 퇴근(오후 3~6시)도 가능했다. 이렇게 하자 일하는 부모들이 핵심 근무 시간을 피해 자녀를 등·하원, 등·하교시킬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이토추상사가 2021년 9월 출산 후 복귀한 직원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전 직원의 일하는 방식’을 꼽았다고 한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아침형 근무 등을 도입해 출산한 여성 직원의 경력 단절을 막고 이들이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는 설명이다.
이토추상사가 요즘 공들이는 부분은 남성 육아휴직 확대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내각에서 정책적으로 확대하려는 노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내 부부를 비롯한 맞벌이 부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추상사의 남자 직원 맞벌이 비율은 2000년 10%에서 2021년도 43%로 확장세가 뚜렷했다. 특히 2021년에는 20대 남성 직원의 맞벌이 비율이 90%로 압도적이었다. 50대로 갈수록 이 비율은 24%까지 떨어졌지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남성 직원 비율이 75% 이상인 이토추상사가 또 다른 시도를 하게 된 이유다.
이토추상사는 "지난해 남성의 육아 참여 확대에 주력했다"면서 "20~30대 직원 대부분이 맞벌이 가정이며 (이들은) 40대 후반, 50대의 남성 직원들이 걸어온 일과 생활에 사용하는 시간과는 크게 다르다. 성별을 불문하고 직원 개개인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이토추상사의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2015년 44%에서 2020년 52%로 확대됐다. 남성 육아휴직 평균 사용 일수는 2015년 2일에서 2022년 36일로 대폭 증가했다. 일본의 남성 육아휴직 사용자 절반가량이 ‘2주 미만’ 휴직했다고 답했던 2021년 정부 조사 결과를 감안하면 이토추상사의 남성 육아휴직 평균 사용 기간은 다소 긴 편이다.
NTT, 근무 유연성으로 인재 활용·생산성 키운다일본의 최대 통신사인 NTT는 2022년 일본 내 직원 19만명을 대상으로 전면 원격근무 제도를 도입했다. 기본 근무 제도로 원격근무를 도입해 직원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2003년부터 육아나 가족 간호를 위해 주 2회 정도 원격근무가 가능했으나 전 직원으로 확대하면서 워킹맘·대디의 부담을 덜어줬다. 기존에는 회사 사무실에서 편도로 2시간 거리 내에 살아야 했지만, 이러한 조건을 없애고 사무실로 출근 시 출장으로 간주해 비용을 지불키로 했다.
NTT 그룹은 이러한 조치가 직원 입장에서는 공간 제약 없이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고, 회사 입장에서는 인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제도를 도입하자 육아를 이유로 하루 4~6시간 일하는 ‘단시간 근무 제도’를 선택했던 직원 비율이 절반으로 줄었다. 원격근무로 장소의 유연성이 높아지고 출·퇴근 없이 시간을 활용할 수 있어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무실 근처에 사느라 가족과 따로 살아야 했던 직원도 지난해 1월 기준 제도 도입 전보다 10% 감소했다.
NTT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은 코로나19를 계기로 재택근무를 도입했다. 일하는 부모들은 이를 통해 육아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 본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3세 이하 자녀를 둔 근로자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기업 내 제도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현재 일본 근로자들은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하루 근무시간을 6시간으로 제한하는 단시간 근무제를 쓸 수 있다.
남성 육휴 급증한 히타치제작소…무슨 일이?남성의 육아 참여가 저조한 편인 일본에서는 아빠 육아휴직을 확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전자전기업체 히타치제작소는 최근 1년 새 남성 출산·육아휴직 사용자가 갑자기 늘었다. 회사의 지속가능보고서에 따르면 2021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 기준 32.9%였던 남성의 출산휴가 사용률은 2022회계연도에 43.9%로 전년대비 11%포인트 증가했다. 출산휴가가 아닌 육아휴직도 2021회계연도 9.9%에서 2022회계연도 18.4%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남성 육아휴직 기간은 평균 34일로 유지됐다. 히타치제작소는 아시아경제에 "직원들에게 육아휴직을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관리자 등 주요 보직자가 관련 제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도록 노력을 기울이자 사용자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히타치제작소는 특히 지난해 개최한 ‘프리파파·프리마마 세미나’ 개최가 유효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배우자가 임신한 남성 직원과 출산 예정인 여성 직원을 대상으로 육아 정보를 제공하는 행사로 지난해에만 7차례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남성 직원 250여명이 참가했는데, 이들 가운데 98%는 육아휴직 사용을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세미나 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육아휴직 생각이 없다고 답한 29%도 세미나 이후 생각을 바꿨다. 회사가 직접 세미나를 개최해 육아는 물론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 사내 제도를 적극 소개하면서 직원들이 커리어 걱정 없이 안심하고 제도를 활용해도 된다는 일종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으로 풀이된다.
히타치제작소 등 일본 기업의 이러한 움직임은 ‘육아는 엄마 몫’이라 여기는 사회적 관행을 허무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가 2021년 18~55세 미혼 남녀 80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출생동향기본조사에서 미혼 여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이상적인 삶의 과정’으로 ‘출산 후에도 일을 병행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조사 진행 후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출산 후 재취업’, ‘전업주부로 전환’을 제친 결과다. 동시에 결혼 상대의 조건으로 ‘여성의 경제력’을 중시하는 남성이 늘었고, ‘남성의 가사·육아의 능력 또는 자세’를 중시하는 여성 비율도 크게 증가했다.
"동료들에 눈치 보이네"…日 보험사, 수당으로 해결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눈치’ 문제다. 대체 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워 동료들이 업무를 떠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육아휴직으로 인력이 부재할 경우 ‘대체인력을 보충하지 않고 같은 부문의 다른 직원이 대응했다’는 응답이 2019년 52.3%에서 2021년 79.9%로 증가했다. 남성 육아휴직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현지의 평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대형 보험사 미쓰이스미토모해상 화재보험은 지난해 7월 ‘육휴 직장 응원 수당(축하금)’을 도입했다. 직원이 육아휴직을 떠나면 팀 동료에게 최대 10만엔(약 91만원)까지 일시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회사는 당초 육아휴직 당사자에게 출산 축하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직원 간 분열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동료들에게 업무에 따른 금전적 보상을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수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쓰이스미토모해상 화재보험은 남성 직원의 육아휴직 사용률을 2021년 말 86%까지 끌어올렸다.
특별취재팀 'K인구전략-양성평등이 답이다' 김유리·이현주·정현진·부애리·공병선·박준이·송승섭 기자
김필수 경제금융에디터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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