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한 정재용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3.1운동 기록화(독립기념관) |
ⓒ 독립기념관 |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 프리먼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설파했다.
기미년 3.1혁명이 이와 같은 거대한 호수였다. 동학농민혁명,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의병전쟁 등 각급 민족ㆍ민중운동의 흐름이 3.1혁명으로 접목되고, 그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 등 무장독립전투를 비롯하여 조선의용대ㆍ한국광복군 등 각급 독립운동은 3.1혁명을 발원지로 하여 더욱 강화되고, 체계화ㆍ장기화되었다.(김삼웅, [3.1혁명과 임시정부])
3.1혁명이 가능하기까지에는 실로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첫째, 민족대표 33인을 비롯 주도층이 접촉했던 구한말의 몇 대신들, 33인 외에 깊숙이 참여했던 15인, 그리고 학생지도자 등 수백 명이 '거사'의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결코 누설되지 않았다. 총독부는 당일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2월 하순에 비밀리에 인쇄 중일 때 총독부 악질 한인 형사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인쇄소 안으로 들어왔다. 하마터면 만사휴의가 될 뻔했다. 인쇄 책임자 이종일이 하루만 참아달라고 달래고, 손병희에게 데려가 입을 다물게 하였다.
셋째, 민족대표 지도부는 당초 독립선언을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하오 2시에 거행키로 했다가, 전일 자칫 흥분한 시민ㆍ학생과 일경이 맞부딪치게 되면 많은 희생자가 따를 것을 우려하여 인근의 태화관 별실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행하였다.
비밀조직을 통해 탑골공원으로 모인 학생ㆍ시민들은 예정시간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분위기가 산만해지고 혼란에 빠졌다. 이때 한 청년이 연단에 올라가 거침없이 큰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자칫 3.1혁명은 태화관의 '선언'으로 그쳤을지 모른다.
11시 30분경 수양산인(정재용)은 이규갑ㆍ최두현ㆍ노선형 동지와 같이 파고다공원으로 갔다. 그런데 팔각정 정자 위에는 역시 아무런 좌석 준비도 없었고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안산을 참배하러 올라온 듯한 시골 노인 10여 명이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공원 북문으로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석탑을 중심으로 4천여 명이 모여섰다. 학생이 주류를 이룬 인파 속에 시간과 장소는 정적으로 이어졌다.
2시경 회색 중절모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수양산인이 팔각정에 오르며 "이 선언서를 내가 읽어야 할 찰나"라고 번개같은 생각을 했다. 계획에도 없는 돌발적인 것이었다. 순간 손은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선언서를 꺼냈다. 펼쳐드니 <독립선언서>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용기를 내어 '조선' 두 자를 더해 "조선 독립선언서"를 외쳤다. 그러자 군중들은 감격해 '으악'하는 함성으로 장내를 진동시켰고 만세소리는 하늘을 뚫었다.
군중들의 흥분은 격동되고 발을 구르는 쿵쿵소리는 땅이 꺼질 듯 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낭독을 계속했다. 약 10분 만에 38자 46행 8소절의 본문과 공약 3장을 일사천리로 낭독하고 "조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조선 독립만세…."
군중들은 따라서 천지가 진동하도록 제창했다. 학생들은 계속 모자를 벗어 하늘에 날렸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독립의 기쁨을 나누었다.(고춘섭 편저, [수양산인 정재용 전기])
이렇게 하여 점화된 3.1혁명의 횃불은 전국으로 번지고 해외거주 동포사회에도 옮겨 붙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은 누구일까?
정재용(鄭在鎔, 1886~1976)은 황해도 해주에서 통정대부를 지낸 아버지 정추기와 숙부인으로 봉해진 어머니 나주 임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7살 때까지 읍내 서당에 다니다가 1902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듬해 해주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1년 연상인 김재경과 혼례를 치렀다.
신학문을 배우고자 1908년 서울로 와서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김규식ㆍ안창호ㆍ서병호 등 뒷날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된 인사들을 배출한 학교였다. 그가 재학 중일 때 일제의 병탄으로 나라는 식민지가 되고 학교 수업은 식민지 노예 교육장으로 바뀌었다. 1911년 졸업한 정재용은 해주읍 교회 전도사를 거쳐 이듬해 의창학교 교감으로 초빙되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사립학교였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그는 붙잡히지 않고 해주로 돌아와 김영호ㆍ이덕봉ㆍ정희철 등과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밀파한 최일 등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유인물을 만들어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해주청년단을 조직,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0년 1월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해주감옥 등에서 복역하였다.
1922년 3월 평양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고문과 옥고로 상한 육신을 치유하고자 해주 수양산 인근으로 들어갔다. 아호를 수양산인으로 지은 연고이기도 하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1930년부터 해주 구세병원 서무과장에 이어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8.15 해방이 왔다. 해주 민선시장으로 당선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과 함께 1951년 1월 월남하여 부산의 피난생활을 거쳐 고양군 벽제에 자리를 잡았다. 정부에서 3.1절 기념행사 때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일이 주어졌다.
수양산인은 노후에 신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76년 12월 31일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90살이었다. 정부에서 건국포장 애국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의 묘소 앞에 세워진 묘비 내용이다.
영일 정공 수양산인 재용 지사께서는 1886년 11월 6일 고려 충신 정포은 17대 손으로 해주시 수양산 하에서 출생 1911년 7월 29일 경신학교 졸업 후 해주시에서 의창학교 교감 및 교회 전도사로서 교육과 선교사업에 헌신 과수원과 농장을 경영 중 33세시 독립운동에 참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 조선 독립만세를 선창 전국에 자주독립운동의 봉화를 높이 드시다. 그 후 해주와 평양감옥에서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시다. 8.15 해방과 동시에 해주 민선시장을 역임 6.25 사변시 월남 3.1절 기념식전 파고다공원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 독립정신을 고취 건국 유공자로서 대통령 포장을 받으시고 1976년 12월 31일 주 안에서 영면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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