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교의 가장자리] 불행을 이겨낸 ‘힘센’ 우정
“아무리 좋은 학교나 직장에 다닌다 해도, 최후의 순간 내 상여를 앞뒤에서 메어줄 두 명의 친구도 없다면, 그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유명한 명구인지 상관없이 이 서생이 유념해온 구절이다. 오래 친하게 지낸 친구(親舊)는 그냥 알고 지내는 지인(知人)과 다르다. 벗을 뜻하는 붕(朋)은 조개패(貝) 두 개가 곁에 서있는 자세다. 벗과 손을 나란히 맞잡은 모양이 우(友), 깨끗하고 푸른(靑) 마음(忄=心)이 정(情)이다. 우정이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맞잡은 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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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의 유고 보존한 브로트
윤동주의 원고 지켰던 정병욱
서늘한 불행 맞서 피워낸 우정
당신에겐 그런 친구 있습니까
」
특히 글을 나누며 친구를 만나고, 친구와 함께 어진 일을 행하는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의 인물들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1901년 카를대학에서 입학해 막스 브로트(1884~1968)를 만난다. 브로트가 먼저 등단했을 때, 카프카는 상해보험회사에서 습작 중이었다. 이후 『변신』 등 주목받는 소설을 발표한 카프카는 1921년 “유고를 불태워 달라”는 유언장을 브로트 앞으로 써놓고 사망한다. 1939년 독일이 체코를 침략했을 때 브로트는 카프카의 유고를 들고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피한다. 이후 여러 곡절을 거쳐 카프카의 원고는 빛을 본다. 지금도 카프카 묘지에 가면, 마치 대화하듯 카프카와 브로트의 묘지는 마주보고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95)와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만난다. 1930년대에 극우였던 블랑쇼는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려는 유대인 레비나스의 가족을 숨겨준다. 보수적인 블랑쇼는 동유럽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이방인 레비나스와 입장은 다르지만 블랑쇼는 레비나스와 함께 하이데거를 읽고, ‘바깥의 사유’를 깨닫는 섬광의 순간을 공유한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공유하면서, 블랑쇼는 후기에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등 초기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들에게 우정이란 서로를 변형시키는 동력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서로 차이와 영역을 존중하는 느슨한 결합이었다. 거의 사진을 찍지 않은 블랑쇼는 레비나스와 찍은 사진을 드물게 남겼다.
섬진강이 남해포구로 접어드는 망덕포구에 가면 윤동주(1917~45)와 정병욱(1922~82)의 우정이 잔물결 친다. 소설가 김훈이 극찬한 ‘섬진강 자전거길’의 출발지인 망덕포구 맑은 바다에는 은어 떼가 노닐고 재첩이 군거한다. 이 작은 목조주택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에 가면 두 사람의 인연이 떠오른다.
1940년 연희전문에 갓 입학한 정병욱의 기숙사 방을 누군가 노크한다. 신문에 발표된 정병욱의 ‘뻐꾹이의 전설’을 읽고 찾아간 윤동주였다. “정형, 글 잘 읽었어요.” 곧 친해진 두 사람은 함께 영어성경 읽기 모임에도 함께하고, 1941년에는 누상동 9번지에서 함께 하숙하고 혼마치(현재 명동)를 산보하기도 한다. 망덕포구 주조장 집 마루에 잠잠히 앉아 있으면 그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어머니, 동주형 시 원고예요. 들키면 위험해요. 저와 동주 형이 살아 돌아올 테니 소중히 간수해주세요.”
망덕산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주조장 집에는 수시로 일본 순사들이 드나들었다. 말없이 어머니는 원고를 보자기에 싸서 항아리에 넣고, 마룻바닥 아래 항아리를 묻은 뒤 그 위에 마루를 덮는다. 금지된 언어로 쓴 글은 즉시 반역죄가 되는 광포한 시대였다. 어둠에서 1년 7개월간 숨을 고르던 19편의 생명, 지상에 한 권밖에 없는 자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생기롭게 살아남는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에서 윤동주가 사망하고, 징병 갔던 정병욱은 가까스로 돌아와 윤형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마루 밑에 보관한 원고와 다른 시를 모은 31편으로 정병욱은 1948년 윤 선배의 시집을 출판해낸다. 윤동주의 자필 원고 위에는 정병욱이 교정 본 흔적들이 있다. 정병욱은 판소리와 한국고전문학의 오롯한 대학자로 남는다. 동주의 남동생과 병욱의 여동생이 결혼해 사돈이 된 두 사람의 얼은 이 옛집의 공기를 시큰하게 한다.
브로트가 없다면 카프카는 없다. 레비나스가 없다면 블랑쇼는 없다. 정병욱이 없다면 윤동주는 없다. 덮쳐오는 서늘한 불행을 이들은 ‘힘센’ 우정으로 맞짱 떴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밉상이 아니라 친구로 기억되고 싶은 설날, 군색하지만 전화라도 걸어야겠다. 프랑스어로 사랑(Amour)과 우정(Amitie)은 모두 ‘아’로 시작한다. 처음 태어난 아이가 내뿜는 첫 발음을 닮은, 아, 진정한 우정은 느낌표를 절제할 수 없구나!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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