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만 농민표 잡으려고…EU, 논쟁 중이던 농약법 폐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시위에 깜짝 놀란 유럽연합(EU)이 기후 변화에 대응하려고 준비한 농업 정책을 폐기하기로 했다. 4개월 후에 열리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성난 농심을 자극해 표를 얻으려는 극우파를 막기 위해서란 관측이 나온다.
EU, 농민 시위에 농업 정책 폐기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의회 본회에서 '지속가능한 살충제 사용 규제(SUR)' 발의 제안을 철회할 뜻을 보였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농민들이 농업의 미래와 농부로서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걸 알고 있다"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SUR은 집행위가 지난 2022년 6월 발의한 규제로, 오는 2030년까지 EU의 각 회원국은 화학 살충제의 사용을 50% 감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이다.
당초 EU는 '그린딜'(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달성) 정책을 도입하면서 농가에 살충제·제초제 등 농약 사용량과 질소배출량에 대한 규제 강화를 강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난달 중순부터 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스페인·불가리아 등 유럽 각국 농민들이 트랙터로 도로를 봉쇄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또 EU는 오는 2040년까지 달성하기 위한 기후 목표치에서 농업 분야의 감축 목표치를 통째로 뺐다. 집행위가 이날 발표한 2040년 기후 중간목표 관련 통신문에는 초안에 나왔던 농업 분야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5년 대비 30% 감축해야 한다는 내용이 삭제돼 있었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웝크 훅스트라 EU 기후담당 집행위원은 "EU 시민 대다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체감하고 보호받기를 원하지만, 자신들의 생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걱정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극우 약진에 놀란 EPP가 요구
이와 관련해 폴리티코는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 앞두고 900만 농민표를 잡기 위해 EU 집행위원회가 결단을 내렸다고 짚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소속된 중도우파 유럽인민당(EPP)은 농민들이 반대하는 EU의 농업 정책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EPP는 유럽의회에서 23%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올해 선거에서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에서 극우 정치세력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약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EPP가 농촌 표심을 잡기 위해 손을 쓴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달 말 유럽외교협회(ECFR)의 조사에 따르면 다가오는 선거에서 극우 성향 정당들이 9개국에서 제1당이 되는 등 의석을 크게 늘릴 것으로 예상했다.
EU 최대 농업 단체 코파-코게카(COPA-COGECA) 등 일부 농민들은 EU의 결정을 환영했다고 BBC방송이 전했다. 크리스티안 램버트 코파-코게카 대표는 "EU 집행위원회가 마침내 강행하려 했던 농업 정책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반면 유럽 녹색당의 바스 아이크하우트 의원은 "EU 집행위원회가 농업에 관한 모든 내용을 삭제했다"면서 "살충제 사용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EU, 유럽판 IRA 협상 마무리
한편 EU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중국의 공격적 투자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한 '탄소중립산업법'에 대한 협상을 마무리했다.
EU 상반기 순환의장국인 벨기에 정부는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이사회·유럽의회·집행위원회 간 탄소중립산업법에 관한 3자 협상이 잠정 타결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유럽의회와 이사회의 승인을 받으면 관보 게재를 거쳐 이르면 올해 말께 발효될 것으로 관측된다. 최종안의 세부 내용은 관보 게재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이 법은 그린딜 산업계획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친환경 산업에 대한 규제 간소화와 기술개발 지원 등을 통해 EU 역내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구체적으로 ▶태양광 ▶풍력 ▶배터리 ▶히트펌프·지열에너지 ▶수전해장치 ▶바이오메탄 ▶탄소포집·저장(CCS) ▶그리드 등 8개 탄소중립 기술의 생산 역량을 2030년까지 40%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즉 '메이드 인 유럽'을 육성하겠다는 구상으로 유럽판 IRA로 불린다.
박소영 기자 park.sooy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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