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군 탈영 대위가 한국행을 택한 까닭
[애증의 정치클럽]
미얀마 쿠데타 3년째, 45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2만 6000명이 체포됐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국경을 넘은 사람은 260만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봄의 혁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혁명 초기보다 국제 사회의 관심은 줄어들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에는 무력 저항인 '1027작전'으로 군부를 압박하며 전세를 뒤집기도 했는데요.
미얀마 탈영 군인 린 텟 아웅 대위는 항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2021년, 그는 탈영병 중 처음으로 쿠데타 군대에서 탈영해 시민불복종운동(CDM)에 합류했음을 알렸습니다. 군인 동료들을 독려하기 위해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는 위험을 무릅썼고, 이후에도 탈영병을 돕는 활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2023년 7월, 린 텟 아웅 대위는 한국에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 태국에서 망명하며 활동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끝까지 싸우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말합니다. 지난 1월 31일 <시사인>과 함께 린 텟 아웅 대위를 만났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과 미얀마의 현 상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 린 텟 아웅 대위 |
ⓒ 애증의 정치클럽 |
- 왜 한국행을 택하셨나요?
"호주나 미국 같은 제 3의 나라로 갈 수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한국을 선택하게 된 건 우선 시차 때문이에요. (미얀마 현지와 연락하기에) 서양 국가는 시차가 많이 나는데 아시아에서는 밤낮이 바뀌진 않잖아요. 그리고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시민단체의 참여도가 높고,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도 활발해요. 한국 거주 미얀마인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이 특히 강하기도 하고요."
- 한국에선 어떻게 활동을 이어가고 계신가요?
"태국에 있었을 때부터 온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어요. 우선 시민방위군(PDF) 군사 훈련을 계속해 왔고요. 그리고 '시민의 품(People's Embrace)'이라는 단체를 운영했어요. 전향을 원하는 군인과 경찰들을 돕는 곳이에요. 페이스북을 통해 활동하고 있는데요. 미얀마 민주 진영의 민족통합정부(NUG) 측 통계에 CDM 내 전향군인으로 등록될 수 있게 하고, 탈영 과정에서 해방 구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요. 전향 후의 생활을 지원하기도 하고요. 현재 NUG 통계에 잡힌 전향 군인이 6천 명, 경찰은 8천 명이에요. '시민의 품'과 비슷한 단체가 5곳 정도 있는데 저희 단체를 통해 들어간 사람이 2~3천 명 쯤 돼요."
- 군부 독재 체제가 공고한 것 같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군부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네요.
"미얀마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실종된 지 3년째인데, 시민들의 항쟁이 그동안 끊기지 않은 걸 보면 군부에도 타격이 있다고 할 수 있죠. 군부 측 사망자가 2~3만 명 정도로 파악돼요. 민주 진영은 최근 군부에 맞서 큰 성과를 이뤘습니다. 3개 소수민족 무장단체가 연합한 무장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겁니다. 지난해 10월 27일 미얀마 북동부의 샨주에서 펼친 '1027작전'입니다. 이 작전에서 미얀마군 수백 명이 숨졌고, 220여 개의 미얀마군 주둔지가 점거됐습니다. 이후 다수의 미얀마군이 반군에 투항했습니다."
- 17살 때 입대하셨다고 들었어요. 이후 탈영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정확히는 16살 4개월, 2008년도였어요. 13년 동안 군인 생활을 했는데요. 사실 봄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을 나가고 싶었어요. 군인의 목적은 국방인데, 명령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행동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계급이 높은 군인들이 국가를 위해 일하기보다 자기 주머니 챙기기에 바쁜 걸 보고 싫증이 났죠. 하지만 내가 곧장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2021년 시민 혁명이 일어났을 때, 지금이 군을 나갈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2월 1일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국민과 한 편에 서서 싸워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탈영은 3월 14일에 했어요. 혁명은 88년에도, 62년에도 있었지만, 2021년 봄의 혁명은 공무원의 시민 불복종 운동, 파업이 있었단 점에서 달랐어요. 그걸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더 이상 이용당하는 군인이 되지 않고 국민의 편에 서겠다고 다짐했죠."
▲ 미얀마 시민 불복종 시위의 상징 세 손가락 |
ⓒ 로이터 연합뉴스 |
린 텟 아웅 대위가 입대한 2008년은 2007년 '샤프란 혁명'이 일어난 직후였습니다. 혁명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미얀마 군부는 2008년 헌법을 개정했고, 그 결과 2015년 총선에서 민주 세력인 민족민주동맹(NLD)이 과반을 차지했습니다.
- 입대 당시에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나요?
"저는 1992년 군사정권 하에서 태어났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군사정권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자랐죠. 군사정권을 비판할 수 있게 되기가 어려워요.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어서 국경을 지키는 게 꿈이었어요. 나라를 위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군에 가서도 열심히 승진해서 승승장구하고 싶었어요.
샤프란 혁명의 의미와 군사정권의 나쁜 점에 대해서도 사실 몰랐어요. 뉴스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거든요.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정보를 바로 찾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군사정권이 만든 환경 안에서만 생활했죠. 당시엔 정치에 정말 진심인 사람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연구할 수 있는 사람들만 샤프란 혁명을 알 수 있었고 민중은 그럴 수 없었어요. 군사정권 입장에서 보면 성공한 거죠. 자기들이 만든 프레임대로 민중이 따라왔으니까요."
- 미얀마 군 조직이 그동안 보여줬던 강압적인 모습들을 생각하면 탈영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의 걱정도 컸을 거고요.
"쉽지 않았죠. 제가 탈영한 곳이 전방 부대 중에서도 세 번째급이었어요. 그 안에서 대위면 매우 중요한 위치잖아요. 저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당장 넘기기 어려웠어요. 나는 나가면 끝이지만, 남아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바로 갈 수 없었죠. 쿠데타 초창기부터 한 달 동안은 안전하게 탈영할 계획을 세웠어요. 일반 시민이 아닌 군인이기 때문에, 체포되면 감옥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림이 바로 그려졌죠. 봄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체포당하지 않고 쿠데타에 맞서 싸우고 싶기도 했고요.
한 달 동안 제 임무를 다른 군인들에게 넘기려고 노력했어요. 드라마 같았죠. 일부러 저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의 미움을 사려고 했어요. 저한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서 일을 넘겼죠. 가족에게는 일체 연락을 안 했어요. 탈영 후 인터뷰에 나온 뒤에야 알게 됐대요. 지금까지도 안전을 위해 가족에게 직접적으로 연락하지 않았어요.
전방 부대에서 탈영하면 즉결 총살이 가능해요. 그래서 탈영 후 14일 동안은 정글에서 헤맸어요. 사흘은 물만 먹고 버텼죠. 그러다 해방 구역에 가기로 결정했어요. 해방 구역이란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 지역 또는 군사위원회가 손대지 않는 지역을 말해요. 무기를 들고 시민방위군에 들어가서 싸울 생각도 했지만 탈영병이다 보니 군에 얼굴이 알려져서 미얀마에서 싸우면 좋지 않을 것 같았죠."
- 미얀마 군인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입대하자마자 군인이 시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세뇌당해요. 시민들의 저항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배워요. 국가가 시민 위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군인이 시민 한 명을 죽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거예요.
군인들에게 혐오를 심기도 해요. NLD와 종교가 핵심 키워드죠. 'NLD가 시민들을 세뇌해 반란을 부추긴다', '이슬람교 때문에 미얀마가 망한다'고 해요. 군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낙인을 찍는 거예요."
▲ 린 텟 아웅 대위 |
ⓒ 애증의 정치클럽 |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미얀마 시민들은 격렬한 저항을 이어왔습니다. 현재 저항 운동의 중심은 민족통합정부(NUG)입니다. 민주 진영이 구성한 정부로 합법적 지위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미얀마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NUG가 주도하는 '봄의 혁명'은 이전의 민주주의 운동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소수민족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간 군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에게 시민들의 분노를 돌려왔고, NLD는 이를 방관해 왔습니다. NLD가 여당이었던 2019년, 아웅산 수치 고문이 로힝야족 학살 의혹을 부인하기도 했는데요.
NUG는 미얀마 정부 중 최초로 인권부를 두고 소수민족 포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NUG의 현 대통령 대행과 총리도 소수민족 출신으로, 로힝야족 난민 차관을 임명하고 소수민족에 차별적인 시민권법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데요. 린 텟 아웅 대위는 '혐오'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연대해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 NUG가 더욱 포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미얀마 시민들은 과거에 없던 단결을 외치고 있어요. NUG 정부 내에 소수민족 등 다양한 분야와 관련된 전문가들을 두고 있죠. 국가통합자문위원회(NUCC)에서 NUG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게 하고요. NUCC엔 CDM, PDF 그리고 소수민족무장단체도 포함됩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주의하고 있어요. NUG는 국제재판소에 로힝야족 문제에 대한 NLD의 반박을 취소하겠다고 공식 서신을 보내기도 했어요.
미얀마 국민이라면 소수민족이든 버마족이든 모두가 평등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려야 하는 인권이 모두에게 보장될 수 있도록 NUG는 노력하고 있어요. 남녀평등도 최근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미얀마도 남성 우월주의가 심하거든요. 민족, 성별, 종교 등 과거의 모든 탄압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한국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군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우기 때문에 인권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요. 처음엔 우리도 평화적 가두시위로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목숨을 잃었어요. 어쩔 수 없이 방위전을 선택하게 됐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숨과 인생을 걸고 싸우고 있어요.
▲ 린 텟 아웅 대위가 직접 제작한 한국어 후드티 |
ⓒ 애증의 정치클럽 |
덧붙이는 글 | 뉴스레터 서비스 '애증의 정치클럽'에서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웹사이트를 참조해주세요: https://lovehate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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