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위한 집이 아닌 살기 위한 집
누구나 무용한 취미가 하나쯤 있다. 내 경우 그건 아름다운 집을 훔쳐보는 것이다. 매거진이나 핀터레스트에 올라오는, 평수도 구조도 제각각인 집들. 그중에서도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집에 번번이 마음을 빼앗겼다. 창문이 크거나 층고가 높고 별다른 장식이 없으면 100%였다. 폐공장을 개조한 스튜디오나 부스 또는 커튼도 없이 샤워기만 덩그러니 놓인 릭 오웬스의 베니스 별장처럼,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아름답게 느껴졌달까. 그러니 영감을 찾아 파리로 떠난 지난겨울, 첫 목적지가 빌라 라로슈(Villa La Roche)였던 건 당연했다. 모더니즘의 아이콘 르 코르뷔지에의 초기 건축물이자 스위스 출신 은행가 라울 라로슈의 집 말이다.
에펠탑 서쪽 파리 16구의 고급 주택가에 현대미술과 디자인 전시장으로 거듭난 빌라 라로슈가 숨어 있었다. 가느다란 기둥이 희고 둥근 외벽을 받치고 선 3층짜리 건물이었다. 손가락처럼 비쩍 마른 나무들이 바람이 드나드는 자리를 기웃거렸다. 1925년에 지어진 필로티 구조라니. 외관만 보면 100년 전이 아니라 100일 전에 지어졌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미술품을 수집했던 라로슈의 특성상 테마는 ‘컬렉터의 집’이요, 큼지막한 로비를 가운데 두고 갤러리와 주거공간이 펼쳐지는 곳. 빌라 라로슈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였다. 실제로 들어가 보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대미술품 같았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튀어나온 계단참, 군더더기 없이 길쭉한 조명, 선과 선으로 조각난 통창까지 모든 곳이 직선의 향연이었다. 유일한 곡선은 갤러리에 있었다. 2층과 3층 사이에 있는 밤색 경사로를 따라가는 짧은 산책이 곧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이었다. 그 끝의 작은 서재에서는 널찍한 갤러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라로슈도 여기 이렇게 서서 작품을 바라봤겠지. 이름밖에 모르는 남자의 어떤 순간이 상상되는 듯했다. 공간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갤러리를 벗어나면 건너편과 연결된 다리가 나오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욕실과 침실, 드레스 룸이 차례차례 펼쳐지다가 다시 계단으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바닥의 질감과 패턴만이 서로를 구분 지을 뿐. 어떤 방향으로 오가든 모든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창밖의 건물들은 이토록 고전적인데 대체 무얼 보고 느끼며 살았기에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까 감탄하기를 여러 번. 묘한 부재를 느낀 건 한참 후였다. 이상하게도 온기랄 게 없었다. 단순히 12월의 추위 때문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기댈 틈을 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매끈한 타일과 문고리, 딱 떨어지는 직선들이 손대지 말라고 톡 쏘아대는 것 같았다. 깔끔하다는 건 딱 그만큼 냉정해질 수 있다는 뜻일까. 무엇보다 사람이 모일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크기로만 보면 가장 거실다운 건 갤러리였으나 피카소처럼 값비싼 컬렉션으로 가득하니 항상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반면 서재는 좁고 식당엔 앉을 의자도 몇 개 없었으며, 침실과 드레스 룸은 너무 사적인 공간이었다. 집 안은 벽에 걸린 그림들처럼 온통 침묵뿐 평생을 혼자 산 남자가 머물기에는 무미건조했을 것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어쩌면 이곳은 살기 위한 집보다 꼬장꼬장한 건축가의 작품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그러고 보니 이곳을 채운 것들은 순전히 공간을 위한 요소였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조명이나 라디에이터도, 너무 미끄러운 바닥도 모두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거기에 르 코르뷔지에의 취향도 빼놓을 수 없었을 터. 집을 지을 동네부터 그림을 걸어둘 장소, 심지어 정원에 심을 나무까지 그의 결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니까.
그러는 사이 집주인의 비중은 종이접기를 하듯 작아졌다. 갤러리에 빛이 와르르 쏟아졌으면 좋겠다거나 식당이 넓어 손님을 자주 초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결국 라로슈에게 남은 건 책 읽기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밤과 뼈가 시리게 추운 겨울이었다. 아무리 불편을 호소해도 바뀌는 건 없었으므로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면 차라리 스위스 본가로 넘어가기를 택했다는 이야기는 조금 눈물겨웠다. 정작 집주인의 삶도 취향도 묻히지 못했던 곳을 ‘빌라 라로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행은 끝났고 빌라 라로슈에서의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사는 이에게 유독 가혹했던 그곳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인지, 기본적으로 어떤 걸 갖춰야 하는지 물음표를 품은 채로. 돌아보니 그간 내가 동경했던 건 생활이 빠져나간 자리였다. 무지해서 가질 수 있었던 취향이었다. 집이란 뻣뻣하게 선 주인공이 아니라 흐릿하게 물러난 배경이 돼야 하는 곳이니까. 훗날 ‘집은 장식품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편안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걸 보면 르 코르뷔지에 역시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던 모양이다. 거장으로 기억되는 건축가의 욕심 넘치는 과도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누구에게나 무용한 취미가 하나쯤 있고, 마음이 헛헛할 때면 나는 여전히 매거진이나 핀터레스트를 기웃거린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풍경에서 삶의 흔적을 읽어내려 한다. 담요가 흐트러진 걸 보니 이 자리에서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는구나, 무심해 보여도 이렇게 유지하려면 매일 먼지를 털어야겠구나. 그러다 그런 상상이 불가능할 만큼 매끈한 공간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빌라 라로슈를 떠올린다. 100년이 지나도록 세련미를 뿜어내던 공간에서 라로슈는 행복했을까, 사는 동안 어땠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건축 유산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겼으니 조금은 행복했을 거라고 믿어도 될까, 궁금해하면서.
전하영
전 세계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싶은 아트 라이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예술과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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