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원료 부실 심사” 국가 배상책임 13년만에 인정
1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 안전성 심사를 소홀히 한 국가에도 배상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처음으로 나왔다. 2011년 임산부들의 잇따른 중증 호흡곤란 사망으로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공론화된 이래 13년 만이다.
서울고법 민사 9부(부장판사 성지용)는 25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항소심에서 1심 결과를 뒤집고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1심 공동 피고였던 ‘세퓨’와 함께) 위자료 총 1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 중 한 명이 사망한 2011년 5월부터 판결이 선고된 6일까지, 약 13년간의 연 5% 지연이자도 더해 지급해야한다.
‘2003년 심사했으니 정당’→ 2심 “심사도 잘못, 방치도 잘못”
항소심 재판부는 가습기살균제에 포함된 원료물질인 PHMG·PGH 성분에 대해 2000년·2003년 정부가 했던 유해성 심사‧공표 및 그 이후 추가 심사를 하지 않고 방치한 부분을 “정당성‧타당성‧합리성을 잃은 위법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1심은 ‘2003년 PGH 유해성 심사 결과 유독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정한 것은 당시 법령에 따른 것이고 주의의무 소홀로 인한 과실이 없다’고 봤는데, 이와 정반대의 판단을 내린 것이다.
재판부는 “국가배상책임을 판단할 땐 공무원의 권한 행사가 국민의 건강·생명·신체에 미치는 영향, 헌법상 국가의 국민보건에 관한 보호의무 등 국가의 책무도 고려돼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대규모 건강 피해를 준 가습기 살균제 원료 화학물질에 대한 불충분한 심사, 불완전한 고시 등으로 인한 국가배상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PHMG는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싹싹의 원료, PGH는 그와 같은 계열의 성분으로 둘 다 세퓨 가습기살균제에 사용된 물질이다. PHMG는 2000년, PGH는 2003년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 물질’로 환경부에 등록·고시됐고, 규제 완화 기조를 타고 안전성 관련 등록 자료 제출이 면제됐다.
“부실 시험, 성급한 고시로 안전성 믿게 해…끔찍한 피해”
재판부는 ▶시험 과정에서 용도, 사용방법 등 심사가 부족했고 이후에도 사용방법 등에 제한을 두지 않은 점 ▶불충분한 심사를 하고도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고시해 국가가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점 등 화학물질 심사‧고시 과정에서 정부의 과실을 인정했다. 이 결과 때문에 이후 ▶PHMG·PGH가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은 채 수입‧유통되고 ▶세퓨가 ‘무독성’ ‘유해한 화학물질 함유되지 않음’ 등의 표현을 써서 제품을 광고하고 소비자들이 믿게 했으며 ▶다수의 사상자를 낸 끔찍한 피해를 발생시켰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환경부 등은 PHMG·PGH에 아무 제한을 두지 않고 ‘유독물이 아니다’라고 공표할 경우,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예견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다만,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 폐질환이 발생한 직후에 역학조사를 즉시 신속하게 실시하지 않은 점 ▶가습기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하지 않은 점 등도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1심과 마찬가지로 항소심에서도 이 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法“구제급여액 빼고 위자료 지급”
재판부는 원고 5명 중 3명에 대해 위자료 명목으로 각각 400만원‧300만원‧5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2017년 2월 제정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특별법에 따라 환경부가 제조·판매사들로부터 징수한 분담금으로 구제급여를 지급받았을 경우, 그만큼을 빼고 배상액을 정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나머지 2명은 이미 피해액만큼의 구제급여조정금액을 받아 위자료로 인정되는 금액이 없다는 것이다. 또 원고들은 실질적인 신체 피해와 관련한 손해배상은 이미 받아 이번 소송에선 위자료 부분에 대한 판단만 받았다.
피해자 측은 “국가의 피해 보상 법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라며 반색하면서도 “유족 조의금, 치료비 등이 ‘위자료’로 산정된 점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환경부는 “판결문 검토 및 관계부처 협의 등을 거쳐 상고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소송은 2014년 8월 1심을 시작해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오기까지 9년 5개월이 걸렸다. 1심은 원고 13명이 피고 6명(옥시, 한빛화학, 용마산업, 롯데쇼핑, 세퓨,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가, 옥시·한빛화학·용마산업·롯데쇼핑은 2015년 9월 조정으로 종결됐고, 2016년 11월 1심 선고는 세퓨와 대한민국을 상대로만 이뤄졌다. 1심에서 국가배상책임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PGH를 넣은 가습기살균제 제조사였던 세퓨의 설계·표시상 결함이 인정돼 합계 5억 4000만원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단이 나왔다. 세퓨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항소하지 않아 항소심이 진행되지 않았고, 이번 항소심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한 심리만 진행됐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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