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기사 분향소엔 눈 쌓인 헬멧만…“만취 운전 엄벌을”

정신영 2024. 2. 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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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 도로변에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배달기사 A씨를 추모하는 임시 분향소가 마련돼있다. 라이더의 상징인 헬멧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정신영 기자

6일 오후 1시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도로변. 8년 차 배달기사인 배우정(38)씨는 흰색 조화 옆에 소주 한 병을 내려놓았다. 사흘 전 바로 앞 도로에서 만취한 20대 여성이 몰던 차에 치여 숨진 배달기사 A씨(54)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배씨는 배달이 몰리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잠시 한숨 돌릴 새가 생기자 바로 달려왔다고 했다.

배씨는 “사고 이후로 새벽에 일하기가 무섭다. 계속 뒤를 쳐다보게 된다”며 “만약 가해 차량에 오토바이가 박히지 않았다면 뺑소니하고 갔을 수 있다. 억울하게 간 50대 가장의 명복을 빌고, 다른 라이더들의 안전도 지켜달라는 의미에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 근처에 마련된 좁은 추모 공간에는 라이더의 상징인 오토바이 헬멧이 놓여있었다. 해당 헬멧은 사고 당시 A씨가 쓰고 있던 헬멧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누군가가 A씨를 기리기 위해 놓아둔 것으로 추정된다.

헬멧 위에는 전날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동료 배달기사들이 보낸 근조 화환 앞에는 A씨의 넋을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놓고 간 술병과 간식이 가득했다. 전날 강한 눈바람에 나부껴있던 물건들을 누군가 정갈하게 정리해놓은 모습이었다.

8년차 배달기사인 배우정(38)씨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 도로변에 마련된 A씨 임시 분향소에 소주병을 내려놓고 있다. 정신영 기자

홀로 살며 배달 일을 하던 A씨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한 추모객은 계속 이어졌다. 모두가 “남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멀리서 분향소를 바라보던 정모(43)씨는 A씨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설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씨는 “새벽 시간에 나한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자식이 3명 있어 남 일 같지 않다”며 “음주운전 단속을 더 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분향소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배달플랫폼 관련 일을 한다는 B씨는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다. B씨는 “그동안 일이 바쁘다 보니 이들이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의 일처럼 생각한 내 모습을 돌아보니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그는 “A씨의 마지막 가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으시길 바란다”며 자리를 떴다.

사고 현장 인근에서 근무하고 있는 유연택(60)씨는 직장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분향소 앞에 나란히 선 이들은 유씨의 “주머니 손 빼고, 50대 가장에게 경례”하는 구호에 맞춰 목례했다. 유씨는 “술을 먹고 차를 탄 것도 모자라 구호 활동을 하지 않고 강아지만 껴안고 있던 가해자의 모습을 보면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곳이 출퇴근길이라는 정욱(47)씨도 “사고 뒤처리나 국민의 분노를 유발하는 철없는 운전자인 게 문제”라며 “최근 마약 운전자도 많은데 생명 경시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모(43)씨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 도로변에 마련된 A씨 임시 분향소에서 자신의 오토바이를 옆에 세워둔 채 묵념하고 있다. 정신영 기자

이곳에서 끔찍한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시민들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사고 현장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는 80대 최모씨는 “아이고 어쩌나. 세상에 이 자리였구나”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른 인근 거주민 20대 여성 C씨는 분향소를 보자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는 “여기일 거라 생각지 못했다”며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안타깝고 먹먹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인근 직장을 다니고 있는 이다혜(31)씨는 분향소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논현 사고’를 검색하고 난 뒤 이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분향소를 보고 누군가 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구나 싶은 생각에 찾아봤다. 열심히 일하다가 갑자기 황망하게 가셔서 마음이 좋지 않다”며 “가해자는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만취한 채 차를 몰다 사망사고를 낸 안 모씨가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험운전치사) 혐의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A씨는 지난 3일 새벽 4시 반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뒤따라오던 유명 DJ 안모(24)씨의 벤츠 차량에 들이받혀 숨졌다. 안씨는 추돌 이후에도 100m가량을 더 가서야 멈춰섰다. 현행범 체포된 안씨는 위험운전치사 혐의로 전날 구속됐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 당시 안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수준(0.08%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안씨에 대해 사고 후 미조치 등 혐의를 추가 적용할지 검토하고 있다. 사고 목격자들에 따르면 안씨는 사고 직후 쓰러진 A씨 구호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반려견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제기되고 있는 의혹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정신영 기자 spiri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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