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김장 봉사·쓰레기 줍기... 세월호 엄마가 안산에서 사는 법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신정임]
짜장면 나눔 봉사라고 했다. 배달 온 짜장면을 나르나? 예상이 빗나갔다. 짜장면을 만들었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봉사자들이 커다란 망에서 양파들을 꺼내 껍질을 벗기고 깍두기 모양으로 썰었다. 감자와 호박도 똑같이 깍두기 모양으로 썰고, 오이는 채를 쳤다. 300인분을 준비한다더니 야채들 양이 어마어마하다. 도마만 10개가 넘는다.
지난해 10월, 노인의 달을 맞아 4.16가족나눔봉사단(이하 4.16봉사단)과 대한적십자사 안산지회 숨트임 봉사회가 함께 경기 안산시 외국인 주민지원본부 야외무대에서 마련한 '원곡동 노인의 날 경로잔치'는 이렇게 준비됐다. '한국SNS연합회 사랑의 짜장차' 봉사자들이 조리를 담당했지만 손이 많이 가는 재료 손질은 두 단체 봉사자 몫이었다.
▲ 4.16가족나눔봉사단이 지난해 10월 20일, 대한적십사자 안산지회 숨트임 봉사회와 함께 노인의 달 맞이 짜장면 나눔 봉사를 진행하면서 직접 짜장면을 만들었다. |
ⓒ 4·16재단 |
엄마들이 '빨리빨리' 하는 이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수학여행에 간다고 들뜬 표정으로 집을 나섰던 아이들을 주검으로 마주하게 된 믿지 못할 현실만으로도 버거워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스스로를 돌볼 틈도 없었다.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은 채 아이들 이름만 부르고 또 부르던 날들이었다.
"그때 우리 곁에서 물도 챙겨주고, 밥도 챙겨주고, 주변 청소도 해주는 분들이 계셨어요. 안산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에 왔을 때도 상주해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고요.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분들이 너무 고마운 거예요. 일일이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 이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어요."
받은 위로를 또 다른 사랑으로 돌려주기로 했다. 참사가 난 바로 다음 해인 지난 2015년부터 연탄 나눔 봉사를 했다. 2018년에는 아예 4.16봉사단을 꾸렸다. 겨울이면 연탄뿐 아니라 직접 몇백 포기씩 김장해서 방한용품과 함께 이웃에 나눴다.
가정의 달인 5월 어린이날에는 안산 지역 어린이들에게 노란 리본과 함께 과자꾸러미를 선물하고, 어버이날에는 안산에 거주하는 어르신들께 선물을 드렸다. "세월호 엄마들이에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맞아. 별이 된 언니, 오빠들 대신해서 엄마들이 소중한 우리 어린이들에게 선물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어버이날 선물은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기리고자 304개를 준비했다.
연탄봉사나 김장처럼 무거운 걸 많이 들어야 할 때는 몸이 고단하다. 수해나 산불화재 지역에 가서 복구 작업을 도울 때는 힘에 부치기도 하다. 봉사 다음 날 앓아누울 때도 많았다. 그런데도 4.16봉사단 엄마들은 어떤 일이든 거침없이 달려든다.
"엄마들이 일을 보면 잠시도 놔두지를 못해요. '빨리빨리'를 무슨 주문처럼 하고 있어요. 옆에서 몸 생각해서 천천히 하라고 해도 엄마들이 뭐랄까. 자식 잃은 허전함을 고된 노동으로 채우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요. 안타깝다가도 어떨 때는 그런 게 도움이 돼요. 일을 하다 보면 배가 고프잖아요. 밥 맛있게 먹고, 같이 일을 하면서 웃기도 하니까..."
봉사현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벗어난다. 위안을 얻음과 동시에 봉사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크다.
"우리가 하도 베풂을 받아서인지 이제는 베푸는 게 너무 좋아요. 봉사하는 분들이 왜 계속 봉사하고 베푸는지 알겠더라고요."
4.16봉사단에게 봉사는 단순히 누군가를 돕는 일이기보다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싸워나갈 힘을 얻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인 것은 아닐까.
▲ 김장 나눔 봉사를 위해 김치를 하고 있는 박정화씨. 세월호 엄마들은 봉사현장에만 가면 ‘빨리빨리’를 외치며 고되게 몸을 쓰면서 마음 속 허전함을 달랜다고 한다. |
ⓒ 4·16재단 |
"장판 밑에 깔아둔 5만 원짜리가 다 탔다는 분도 있고, 돈을 넣어둔 항아리가 깨지면서 안에 있던 것들이 사라졌다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우리는 자식을 잃고, 그분들은 재산을 다 잃은 거잖아요. 같은 피해자의 심정으로 몰입해서 듣게 돼요. 나이 드신 분들이 그만큼 돈을 모으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생각하면 가슴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박정화씨를 비롯한 세월호 가족들은 재난참사 피해당사자로서 또 다른 피해자들의 아픔과 치유를 돕기 위해 재난피해지원 전문가 양성 교육을 받기도 했다. 재난안전전문가는 울진 산불 현장처럼 재난지역에 가서 상담 등을 하고, 초중등학교에 나가 안전교육도 한다.
그는 수업에 들어가면 처음에 세월호에 대해서 짧게 얘기한다. 세월호참사를 알고 있고, 엄마가 줬다고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반갑다. 아이들 앞에 서면 마음을 다해서 이야기한다.
"세월호 언니오빠들은 살고 싶어도 어른들이 살려주지 않아서 꿈도 키울 수 없었어요. 내 안전과 내 생명은 내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어요."
재난안전전문가 중급과정은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현장 실습까지 해서 쉽지 않았지만 꼭 필요했다. '사단법인 4.16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재난안전전문가 양성 중급 과정 수료식에서 그는 이렇게 소감을 발표했다.
"꽃을 잘 피워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일조량과 거름, 그리고 물이 필요해요.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피기 위해서도 그런 것들이 필요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사회(어른)는 어땠나요? 방관하고 방조했어요. 저도 이 사회의 어른이죠.
처음에 이런 프로그램을 마주할 때 굉장히 회의적이었어요. 이런 거 한다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뭐가 얼마나 바뀌겠나 싶었죠.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바뀌면 다른 사람들도 바뀌고 그렇게 사람들이 바뀌면 사회가 변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엄마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 4.16가족나눔봉사단 단장인 박정화씨는 참사 당시 봉사자들에게서 받은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 봉사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
ⓒ 신정임 |
박정화씨는 4.16봉사단 외에도 많은 일을 해왔다. 봉사단장 전에는 4.16공방의 공방장을 맡았고, 9반 '윤희 엄마' 김순길씨와 함께 진행하는 단원FM 라디오방송 중 '끝나지 않은 세월호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세월호참사를 겪으면서 삶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다. 강의하고 라디오방송을 진행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강의 연습을 하다가 생각이 안 나 머리가 하얘지기도 했다. 방송 진행을 하다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한 적도 있다. 남 앞에 서면 눈도 잘 못 맞추고 얼굴부터 빨개지던 사람이었기에 앞에 나서는 일이 부끄럽고 진짜 힘들지만 용기를 낸다.
"남은 가족들 생각해서 일상생활로 돌아간 엄마, 아빠들도 많은데 나는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우리 딸 억울한 걸 풀어야죠. 옛날에는 자식들 위해서 돈을 벌고 생활을 했다면 자식이 없으니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의 딸 은정이는 별명이 '성격 미인'일 정도로 친구들과 두루 잘 지냈다. 집에서도 효녀였다. 일하는 엄마가 힘들까 봐 어깨도 주물러주고 부엌에서 음식하고 있으면 뒤에 와서 "사랑해" 하며 안아주는 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되게 많이 했어요. 평생 못할 말을 다 하고 가려고 했는지 평소에 '사랑해'라는 말을 엄청 많이 했어요."
사랑이 많은 아이는 엄마 일도 열심히 도왔다. 미용실을 할 때는 한 살 위인 오빠와 함께 학교 끝나고 와서 파마를 말 때 쓰는 종이들을 펴는 일을 도맡았다. 은정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식당을 시작하자 두 아이는 주말에 홀 서빙 알바를 했다. 점심 한 끼만 하면 1만 원, 저녁까지 하면 2만 원씩 줬는데 점심만 하고 사라지던 첫째와 달리 은정이는 저녁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 돈을 모아서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이 되면 필요한 걸 사라고 봉투를 건네곤 했다.
가족 이벤트도 은정이가 다 챙겼다. 생일이면 집안 불을 다 꺼놓고 있다가 저녁 늦게 퇴근하는 엄마를 촛불 켠 케이크로 맞이하던 딸이었다. 은정이 얘기할 때가 제일 행복한데 그렇게 예뻤던 딸이 지금은 곁에 없다. 딸이 세상을 떠난 뒤론 집에서 이벤트가 사라졌다. 가족들 생일도 안 챙긴다. 은정이 생일에 케이크만 사다 놓고 조용히 밥을 먹는 걸로 온 가족 생일 기념을 대신한다. 미역국도 끓이지 않는다.
이렇게 10년을 지내오면서 아들한테 많이 미안하다. 참사가 일어나고 한동안은 보이는 게 없었다. 집에 와도 울기만 하다가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 고3이던 아들이 어느 날 "엄마, 나는 엄마 자식이 아니야? 왜 나는 안 봐줘"라고 말했다.
그때야 아들이 보였다. '아, 네가 있었구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엄마가 은정이 그렇게 보낸 게 너무너무 억울해서 그래. 은정이 억울한 거는 풀어줘야 하잖아.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줘. 엄마는 아들도 정말로 사랑한단다."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에야 아들이 조금씩 좋아졌다. 여전히 명절이나 가족들 생일 등 기념일이 돌아올 때가 제일 힘들다. 그런 날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세월호참사가 난 뒤로 명절 때 시댁이나 친정에 간 적이 없다. 서로 어색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도 힘들고, 팽목항과 목포 신항에서 명절상을 차리기 때문이다.
"딸 보내놓고 지금까지 우리 아들하고 명절을 같이 보낸 적이 없더라고요. 이번 추석 때에야 그 생각이 든 거예요. 추석날 팽목에서 음식을 하다가 아들한테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그냥 원룸 방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들, 엄마가 그동안 못 챙겨서 미안해"라고 사과하자 아들은 "괜찮아, 엄마. 은정이 일인데 뭘"이라고 쿨하게 말했지만 말끝에는 외로움이 묻어났다. 다음날 불러 같이 밥을 먹으면서 앞으로 명절은 같이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은정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외쳐온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진 게 없다.
▲ 4.16가족나눔봉사단은 매달 화랑유원지에서 줍깅 봉사를 하며 4.16생명안전공원의 필요성을 안산시민들에게 전하고 있다. |
ⓒ 4·16재단 |
4.16봉사단은 최근엔 매달 줍깅 활동도 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단원고 희생자 250명을 추모하고, 생명과 안전에 대한 교육과 소통의 공간으로 건립 추진 중인 4.16생명안전공원 건립 예정지인 화랑유원지를 가꾸면서 생명안전공원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4.16생명안전공원에 대한 여론도 차츰 좋아졌다. 처음엔 안산시 곳곳에 4.16생명안전공원에 대한 반대 현수막이 붙고, 시위도 계속 열렸지만 지금은 그러한 여론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안산 시민들과 만나던 초창기가 생각난다. 봉사활동이나 주민간담회를 가면 세월호 엄마들이 여길 왜 왔느냐는 눈치를 받곤 했다. 사람들이 곁으로 오지도 않았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와서 눈칫밥을 먹어야 하나. 서운하고 속상했지만 계속 그 상태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먼저 다가갔다. 그리고 슬픔을 감추는 법을 익혔다.
"엄마들끼리 다짐했어요. 간담회 가면 울지 말자고요.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굉장히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울다 보면 하고 싶은 얘기도 못 하고 나중에 후회하거든요. 넉살이 좋아야 한다고 되새기면서 울음이 나오려고 해도 꾹 참아요."
행사에 가면 "우리 세월호 엄마들이지만 슬프고 무거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왔어요"라며 다가갔더니 사람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관공서나 다른 단체와 함께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자선행사든 알뜰시장이든 시민들을 만날 일이 있으면 더 신경을 썼다. 음식을 해도 푸짐하게, 선물을 해도 예쁘고 좋은 걸 준비하려고 애썼다.
진짜 마음은 통하는 법. 이제는 지역에서 '언니, 동생'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행사를 가면 "여기 세월호 엄마들이에요. 세월호 잊으면 안 돼요"라고 먼저 소개하는 엄마들도 생겼다.
2024년 완공 예정이던 4.16생명안전공원이 아직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2021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22년쯤 준공할 계획이었지만 안산시와 기재부 등 관계기관의 행정처리가 지연된 탓에 예정보다 늦어졌다. 2026년 상반기 준공만큼은 지켜져 별이 된 아이들에게 4.16생명안전공원을 선물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아이들이 떠난 지 10년이 다 되도록 추모 공원을 이루어놓지 못한 미안함에 더 자주 화랑유원지에 나가 쓰레기를 줍고, 간담회에 나가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 짜장면 나눔 봉사를 마친 4.16가족나눔봉사단. 음식을 만드는 내내 주부 9단들의 면모가 돋보였다. |
ⓒ 4·16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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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달빛 노동 찾기> <숨은 노동 찾기>의 공동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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