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국가 책임 첫 인정… "정부, 유독물 잘못 공표"
[김성욱 기자]
▲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원 삼거리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주최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세퓨 제품피해 국가책임 민사소송 2심 판결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사회자가 관련 제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날 법원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3명에게 300만∼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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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강 : 6일 오후 6시 20분]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도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6일 처음 나왔다.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본 1심 판결을 뒤집은 결과라 파장이 예상된다.
다만 법원이 영아 때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15세가 된 현재까지 산소호흡기 없이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피해자와 그 부모에게 300만~500만원의 위자료만 인정, 좁은 배상액 범위가 한계로 지적된다.
1심 판결 뒤집고 국가 책임 최초 인정… "정부, 유독 화학물질 잘못 공표"
서울고등법원 민사합의9부(부장판사 성지용 백숙종 유동균)는 이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김아무개씨 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피고(대한민국 정부) 소속 환경부 장관 등이 PHMG·PGH에 대해 불충분하게 유해성 심사를 했음에도, 그 결과를 성급하게 반영해 일반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한 다음 이를 10년 가까이 방치했다"라며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가 있다고 할 수 없다"라며 국가에 대한 손배 청구를 기각했던 지난 2016년 1심을 깬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 때와 마찬가지로 "역학조사 미실시,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의약외품 미지정 등과 관련해선 여전히 공무원의 위법행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도 "화학물질에 대한 유해성 심사 및 그 공표 과정에서 공무원의 재량권 행사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어 사회적 타당성이 없거나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환경부 장관 등은 이 사건 화학 물질(PHMG·PGH)이 음식물 포장재 등 일정한 용도로 사용될 것을 전제로 유해성이 낮고 환경에 미칠 영향이 적으므로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심사·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PHMG·PGH가 심사된 용도 외로 사용되거나 최종 제품에 다량 첨가되는 경우에 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해당 물질 자체의 독성 등 유해성이 일반적으로 충분히 심사·평가되거나 그 안전성이 검증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환경부 장관등은 PHMG·PGH가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 물질이다'라고 일반화하여 공표했고, 이로써 마치 국가가 해당 물질 자체의 일반적인 유해성을 심사·평가해 그 안전성을 보장한 것과 같은 외관이 형성됐다.
그 후 PHMG·PGH는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은 채 수입·유통될 수 있었고,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 제조자도 이를 원료로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 가습기살균제의 판매자가 '무독성', '유해한 화학물질 함유되지 않음' 등의 표현으로 위 가습기살균제를 광고하고, 이를 믿은 일반 소매자들에게 위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하는 데에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 장관 등은 이 사건 화학물질에 대해 용도 및 사용방법에 관한 아무런 제한 없이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공표하는 경우 국민의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사건 화학물질에 대한 불충분한 유해성 심사와 고시 및 그 화학물질을 이용한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의 제조·유통은 국민의 건강·생명·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고 직접적이었다. 2022년 3월 31일 기준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자는 7685명이고, 그 중 사망자는 1751명에 이른다."
- 재판부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2심 선고가 열린 6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이정일(왼쪽), 송기호 변호사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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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결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불거진 지난 2011년 이후 사법부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사례라 의미가 크다. 2024년 2월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만 5667명(신청자 총 7891명), 사망자만 1258명에 달해 향후 비슷한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를 대리한 송기호 변호사는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나 "국가가 단순히 피해자들을 시혜적으로 돕거나 가해기업으로부터 보상받는 걸 지원하는 정도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할 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을 법원이 최초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법원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에 의해 피해자들에게 지급된 '구제급여조정금'을 위자료와 동일한 성격으로 해석해 배상액 범위를 과도하게 좁힌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이에 따라 이날 항소심 판결을 받은 피해자 5명 중 이미 1세 때 사망한 영아의 부모 2명은 끝내 위자료를 인정받지 못했다. 나머지 3명은 역시 1세 때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15세가 된 현재까지 산소호흡기 없이 생활이 불가능한 자녀를 둔 한 가정인데, 각각에게 300만~500만원만 위자료로 인정됐다.
송 변호사는 "피해구제특별법 자체가 위자료에 대한 성격 규정이 없기에 구제급여를 위자료로 본 법원의 판단은 대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피해자를 대리한 이정일 변호사 역시 "한 아이가 평생 산소호흡기를 달고 다녀야 하고, 그 당사자와 그 아이를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고통스런 심정 등을 고려했을 때 300만~500만원의 위자료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변호인들은 상고 의사를 밝혔다.
앞서 지난 2014년 '세퓨'라는 기업에서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썼다 숨지거나 건강을 잃은 유족·피해자 5명은 기업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16년 1심에서 기업의 배상 책임은 인정됐지만 국가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옥시 등 다른 가해 기업들과 달리 세퓨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후 폐업해 피해자들이 배상금도 받지 못한 바 있다. 세퓨 피해자 5명은 생후 1년도 안 된 영아를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잃은 부부, 그리고 산소통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15세 자녀와 그 부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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