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 없는 섬진강 상류에 열차 정거장이라니
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사회, 문화, 역사, 설화와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스토리텔링으로 간략히 엮어갑니다. <편집자말>
[이완우 기자]
▲ 진안 백운면 반송리 만육선생유허비 |
ⓒ 이완우 |
섬진강 발원지로 알려진 데미샘을 찾아가는 길목에 진안 백운면 반송리가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소반 모양의 250여 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반송리(盤松里) 명칭의 주인공이다. 2월 초 입춘 절기에 진안 백운면의 열차마을을 여행하였다.
반송리 원반송 마을 앞을 자동차로 통과하면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비각이 하나 눈에 띄인다. 이 비각은 구남각(龜南閣)으로 '충익공만육최선생양돈적유허비(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의 건축물로 1871년(고종 8년)에 건립되었다.
만육 최양(晩六 崔瀁, 1351 ~1424)은 고려 말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조선 건국에 뜻을 달리하여 은둔하였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1338~1392)가 1392년 4월에 선죽교에서 죽자, 그는 이곳 반송리를 거쳐 진안 중대산(장수 팔공산, 1151m)으로 들어가 3년간 은둔하였다. 만육 선생은 조선 태조가 여러 번 재상 자리에 초빙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번번이 거절하였다.
▲ 진안 백운면 신암리 만육선생돈적소 석굴 |
ⓒ 이완우 |
만육 선생 유허비에서 동남쪽으로 6km 직선거리 떨어진, 중대산 기슭 고중대 지역의 암릉 절리 틈 석굴에 만육 선생 돈적소(遯蹟所)가 있다. 돈적소는 중대산 북서쪽 해발 850m 높이 외진 곳에 숨어 있는 2층의 자연 석굴이다. 이 석굴의 크기는 입구가 폭 6m, 높이 2m, 깊이 12m의 원뿔형으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진다. 석굴 천장의 암석 절리 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고드름이 석회암 동굴의 석순처럼 자라고 있었다.
이곳 돈적소를 찾아가려고 유허비에서 742번 백장로를 따라 데미샘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진행했다. 진안 신암리에서 서구이재(호미고개)를 넘어 장수 송천리로 향하는 고개 입구에서 임도를 한참 걷다가 산비탈 오솔길을 500m 올라갔다. 외딴 산길에 산죽, 낙엽, 부엽토, 너덜 바위와 잔설 등의 구간을 거치는데, 길은 희미하며 험하고 녹록지 않은 조건이다. '만육선생돈적소 입구'와 '만육선생돈적소'를 지도에서 GPS 검색하여 위치를 확인하면서 찾아가면 안전하다.
만육 선생은 젊은 시절에 태조 이성계와 동문수학하였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1380년에 남원의 황산대첩 왜구 토벌에 출정할 때, 정몽주와 만육 선생은 함께 고려군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 진안 백운면 신암리 만육선생돈적소 앞의 임실 성수산 연봉 전망 |
ⓒ 이완우 |
돈적소에서 직선거리 2km의 임실 성수산 연봉 능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임실 성수산에는 이성계 장군이 1380년에 황산전투에서 대승하고 개선하는 길에 새로운 나라를 열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설화가 전승된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함께 힘을 합하였던 이성계 장군과 만육 선생이 1392년에는 조선을 창업한 군왕과 고려와 운명을 같이 하려는 은둔자로 뚜렷하게 운명이 갈렸다. 태조 이성계와 만육 선생을 상징하는 성수산과 돈적소가 같은 중대산 아래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바라보고 있으니, 그 반어적 운명의 갈림에 마음이 먹먹하다.
만육 선생이 끝까지 조선에 출사를 거부하고 은둔하였으나, 태조 이성계는 군왕으로서 만육 선생을 위해 <금감록(金鑑錄)>이란 책을 지었다. 이 책에서 태조 이성계는 만육 선생의 행적을 기술하고 공적을 치하하며, 최양의 후손을 조선 개국 공신처럼 영원히 대우하라는 어지를 밝혔다.
▲ 진안 중대산(팔공산) 기슭 너덜 바위에 핀 지의류(dog lichens 추정) |
ⓒ 이완우 |
돈적소의 석굴에서 낙숫물 듣는 소리가 겨울의 깊은 산속을 더욱 적막하게 한다. 너덜 바위 위에 지의류가 여러 종류 피어있었다. 처음 보는 종류의 지의류(dog lichens로 추정)가 있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사진에 담았다. 휴대하는 지의류 도감에서 같거나 비슷한 종류를 찾을 수 없었다.
돈적소를 떠나 반송리 마을의 유허비를 다시 찾았다. 유허비가 있는 구남각을 에두른 돌담 바깥 가까이에 돌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 앞면에 희미한 글씨 '제룡교 선달 송공경모 시혜비(濟龍橋 先達 宋公敬模 施惠碑)'를 읽을 수 있었다. 유허비와 시혜비의 앞을 흐르는 섬진강 상류를 이 지역에서는 제룡강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 앞 제룡강에는 옛날부터 다리를 놓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 진안 백운면 반송리 만육선생유허비 옆 제룡강 섶다리 나무 교각 흔적의 바위 구멍들 |
ⓒ 이완우 |
만육 선생 유허비를 건립할 시기인 1870년 무렵에 선달 송경모가 제룡교에 섶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제룡강 하천 너럭바위에 섶다리의 통나무 교각을 세웠던 원통형 홈이 몇 개 보인다. 이 섶다리가 놓인 이후로 두 마을에 별 탈이 없고, 주민들은 강을 건너는 걱정거리를 덜어 그 고마움에 시혜비를 세웠다. 현재는 콘크리트 교량이 설치되었고, 섶다리는 전설처럼 이야기된다.
▲ 진안 백운면 반송리 지네산과 열차마을 풍경 |
ⓒ 신귀선 |
길게 차량을 연결하고 달리는 열차는 지네 형상에 비유되곤 한다. 뒷산이 '지네 형국'인 반송 마을 앞에 산뜻한 열차가 위치하여 있으니, 마을의 전통과 풍수 이야기를 계승하며 현대화시킨 참신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미샘역의 열차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셨다. 열차 차창으로 보이는 반송 마을 지네산과 두원 마을 닭산을 보니, 달리는 열차에서 이 마을의 옛날 이야기가 방송 되는 듯하다.
데미샘역의 열차 카페에서 이 마을이 고향이라는 신귀선(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씨가 열차의 차창으로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에 제룡강의 얕은 물가와 모래톱에서 놀던 그리운 시절을 기억해요. 강물이 깊은 곳에 정각소가 있었는데, 깊은 물이 휘돌아가서, 무서워하며 가까이 가지 못했어요. 섬진강은 맑고 수량이 많았고, 강가에 늘어선 느티나무 숲은 여름에 참 시원했지요. 섬진강 상류 우리 마을의 만육 선생의 유허비, 돈적소, 제룡강 섶다리, 지네산과 닭산의 풍수지리 설화 우리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설화와 역사가 잊히지 않고 오래 이어가면 좋겠어요."
이 마을을 지나서 장수군으로 넘어가는 서구이재(호미고개)의 십리 벚꽃길은 화사한 꽃들이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이룬다. 8월 여름, 이 마을에 쉬나무가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우면 하얀 등불이 켜진 듯하다. 쉬나무는 열매로 기름을 짤 수 있어서, 불을 밝히는 서당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 진안 백운면 반송리 열차마을 풍경 |
ⓒ 신귀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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