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16) 벧엘교회 개척… 한국 이민자들의 손과 발이 돼 봉사

임보혁 2024. 2. 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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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더 하겠다며 한인장로교회를 사임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목회 사역을 멈추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1974년 시카고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직전 내 주변엔 '맞이하는 교회에서 찾아 나서는 교회로!'라는 뜻을 같이하는 12가정이 모여들었다.

또 아무래도 이민자들이 많은 교회이다 보니 외로워서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에 한인교회는 이민자들을 돕는 이른바 '사회 복지 사업' 같은 역할이 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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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법 발효돼 많은 이민자 미국 정착 외로워서 교회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
아파트 구하고 자녀 입학 도와주는 등 ‘사회 복지사업’과도 같은 역할 도맡아
1970년대 중후반 림택권 목사가 시무했던 당시 미국 시카고 벧엘장로교회 주보.


공부를 더 하겠다며 한인장로교회를 사임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목회 사역을 멈추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1974년 시카고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직전 내 주변엔 ‘맞이하는 교회에서 찾아 나서는 교회로!’라는 뜻을 같이하는 12가정이 모여들었다. 그 무렵 미국 이민법이 발효됐다. 한국에서 건너온 많은 이민자가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했다. 그렇게 73년 10월 14일 우리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한 미국 현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내가 두 번째로 개척한 교회인 벧엘교회의 시작이다.

우리가 공간을 빌려 예배를 처음 드렸던 미국 현지 교회는 복음주의 계열의 침례교회였다. 그 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회 담임 루디 목사와 그의 사모 헬렌은 이후 몇 년 동안 우리 교회 주일학교 중등부 학생들을 도와주셨다. 그들은 나중에 애리조나주 피닉스 교회로 전임을 갔는데 우리 가족이 그곳까지 휴가를 가서 함께 즐겁게 지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특히 그분들은 자녀가 없어서 우리 아이들과 교회학교 아이들을 무척 사랑해 주셨다.

나에겐 두 번째 교회 개척이었지만 한국의 정원교회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비록 한인교회였지만 교인 간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도 컸다. 또 아무래도 이민자들이 많은 교회이다 보니 외로워서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교회에서 줄 수 있는 것과 교회를 찾아오는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너무 달랐다.

당시에 한인교회는 이민자들을 돕는 이른바 ‘사회 복지 사업’ 같은 역할이 시급했다. 예를 들면 누군가 한밤중에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도착했다며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받으면 당장 공항으로 달려가 그의 짐을 싣고 차를 태워주며 그를 단칸방 아파트까지 데려와 직업까지 구해 주는 일이 빈번했다. 이민자가 갖고 온 돈을 은행에 저금하는 일을 돕는 일도 예사였다. 아파트를 구하는 일부터 자녀 학교 입학 돕기 등 정착을 위해 교회가 챙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사회 내 한인을 위한 이민 목회는 태동기였다. 목회자들은 변변찮은 자동차 한 대 없이 그 넓은 미국 땅에서 교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심방하는 일도 많았다.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1년 넘게 자동차 없이 목회하며 공장에서의 일도 병행하며 살았다. 주로 오전에 학교 수업을 들었고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는 일을 했다. 쉬는 시간이면 공중전화로나마 교인들을 심방하곤 했다. 이후 180달러를 주고 중고차를 샀는데 그때는 자동차 기어가 자동이 아니라 수동식이 대부분이라 두 번이나 면허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더 힘든 일은 정성껏 섬긴 교인들의 정착률이 낮다는 점이었다. 한밤중이라도 공항에 마중 나가 그의 초기 정착을 돕곤 했지만, 어느 정도 미국 생활이 안정되면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비율은 대략 10%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때는 교인 한 분 한 분을 돌보며 이민교회 개척자의 자부심을 가졌던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때 사역이 고생이었다고 생각은 되지 않으니 그저 은혜일 뿐이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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