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근의 시선] ‘악어 그래프’의 경고 잊었나
“일본에선 이걸 ‘악어 그래프’라 한답니다.”
2011년 여름, 기획재정부 관료 A의 사무실을 들렀을 때 그의 책상머리에 붙어있는 그래프 하나가 눈길을 잡았다. “이게 뭡니까”라고 가볍게 물었더니, 돌아온 설명이 자못 진지했다. 이른바 악어 그래프는 197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세입과 세출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었다. 나란히 가던 두 선의 향방은 90년대 들어 아래위로 확연히 갈라진다. 거품 붕괴에 들어오는 돈은 급격히 줄어드는데, 나가는 돈은 계속 불어나면서다. 그 격차는 고스란히 나랏빚으로 쌓였다. 빚을 갚기 위해 지출은 더 불어난다.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며 그래프는 악어가 입을 쩍 벌린 형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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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개혁 실종 속 실버 포퓰리즘
“고령화 선제 대응 못해 재정 파탄”
13년 전 일본 관료 한탄 상기해야
」
더 흥미로운 건 A가 이 그래프를 책상 앞에 붙여놓게 된 사연이었다. 그는 직전에 도쿄에서 열린 한일 재무장관 회담에 배석했다. 그 자리에서 당시 일본의 마나고 야스시(眞砂靖) 주계국장(우리의 예산실장 격)이 직접 이 그래프를 띄워놓고 재정 상황이 어려워진 과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인상 깊은 충고와 함께.
이런 일화는 ‘악어 그래프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됐고, 상당한 반향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박재완 기재부 장관은 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정치권의 각종 복지 공약과 지출 확대 요구를 ‘먹이통에 몰려드는 돼지 무리(포크 배럴)’에 비유하며 강하게 맞섰다. 기재부도 2050년까지의 장기 재정 전망을 공개하며 잠재된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악어 그래프’는 재정 건전성이 위협받을 때마다 소환됐다.
13년 전의 일이 새삼 떠오른 건 최근 기재부가 내놓은 ‘국세 수입 집계’ 결과를 보면서였다. 지난해 국세로 걷힌 돈은 344조1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51조9000억원이 줄었다. 예산으로 잡아놨던 세수 예상치에 비해선 56조원 이상 적다. 2013년 이래 최대 규모의 세수 펑크다. 당연히 재정에도 구멍이 크게 났다.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관리재정수지는 11월까지 64조9000억원 적자다. 지난해 국가채무도 1100조원을 돌파했을 것이란 계산이다. 13년 전 GDP 대비 30% 수준이던 국가채무 비율은 어느덧 50% 수준에 다다랐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정점을 찍었던 채무 증가율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더 찜찜한 건 마나고 국장이 했다는 또 다른 얘기가 생각나서다. 그는 일본의 재정 상황이 악화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로 급속한 고령화를 들었다고 한다.
고령층이 늘어난다는 건 단순히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한다는 것만 의미하진 않는다. 고령층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며 개혁도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게 그가 한 조언의 요지였다. “일본의 인구 네 명 중 한 명이 연금을 받는데 정치권이 어떻게 연금에 손을 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번 늘어난 씀씀이는 좀처럼 다시 줄이기 어렵다는 ‘재정 지출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작동하는 원리다. 실제 일본도 부랴부랴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나섰지만, 그 속도는 재정 악화와 고령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 듯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채무다.
한국도 고령(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내년이면 20%를 넘어 이른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지난 2018년에 고령사회(전체 인구의 14%가 고령 인구)에 들어선 지 7년 만이다. 영국(50년), 프랑스(39년), 미국(15년)은 물론 일본(10년)보다 빠른 속도다.
일본 관료가 전한 ‘개혁 지체’도 현실화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연금개혁 논의는 실종 상태다. 대신 간병비 건강보험 급여화, 경로당 무상 급식 등 총선을 앞두고 노년층 표심을 향한 공약만 난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총선 유권자 중 60대 이상은 31.4%에 달해 20·30세대(28.8%)를 추월했다.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손볼 때가 됐다는 제안이 노인회장의 “패륜아 정당”이란 불호령과 함께 묻히고 마는 것도 결국 이런 정치 역학이 작용한 탓일 것이다.
정부 일각에선 각종 개혁 방안은 일단 선거라는 급한 불부터 끄고 난 뒤 차분히 논의할 것이란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마나고 국장은 당시 한국 재정 관료들에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늦었더라”며 선제 대응의 중요성을 두 번, 세 번 강조했다고 한다. 악어가 입을 벌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다는 얘기다.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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