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행복 호르몬
이런 냉동고 추위는 처음이었다. 이슥한 밤이 되면 밀려드는 황소바람. 워낙 바람이 센 골짜기라 한옥의 문마다 단도리를 했으나 영하 17도 이하로 기온이 곤두박질치는 날은 윗목에 둔 요강에 살얼음이 잡힐 정도였다. 강추위가 물러가고 영상의 기온이 회복된 오늘, 먼동이 틀 무렵 마을 둘레길로 나섰는데 짙은 안개가 길을 막았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운무. 다행히 둘레길 옆으로는 얼음장 아래 여울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고요한 음악으로 흐르는 여울 물소리에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걸었다.
■
「 산책 중에 영양가 높은 볕 쬐고
가까운 친지 같은 나무들 만나
생명은 서로 연결됐음을 자각
」
삼십 여분쯤 걸었을까. 안개가 서서히 걷히더니 해님이 쏙 얼굴을 내밀었다. 매일 보는 해님이지만 안개 속에서 불현듯 나타난 다정한 해님, 얼마나 반갑던지! 둘레길을 걷다 보면 철길이 앞을 가로막는데, 웬 노부부가 철교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볕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노부부는 자기들이 앉아 있는 옆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영양가 높은 볕 좀 쬐고 가시지요.”
“네…?”
“하하하…오늘 같은 아침볕을 쬐면 우리 몸에 행복 호르몬이 흐르거든요.”
노부부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평생 의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행복 호르몬’이란 말을 궁금해 했더니 우리가 햇살을 받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뜻하는 것이라고, 의학적 설명까지 덧붙여주었다. 우리의 뇌에서 세로토닌 신경이 활성화될수록 마음은 평온해지고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고.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노부부와 잠시 수다를 떨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옆길로 빠져 배부른산 기슭으로 들어섰다. 마치 임산부가 누워 있는 듯한 산세를 지녔다 해서 그렇게 불리는 배부른산. 가끔 산길을 걷다가 오늘처럼 옆길로 새기도 하는데, 옆길로 새면 더러 놀라운 보물을 발견할 때도 있다.
산길을 조금 더 오르다 보니, 산비탈에 조성된 나무농원이 나타났다. 소나무와 전나무 같은 침엽수를 키우는 농원이었는데, 온통 푸른빛의 나무들을 보니 문득 생기가 돋는 듯싶었다. 아직 들판이 온통 잿빛인 시절이라 침엽수들은 더욱 싱그러워 보였다.
나는 찬찬히 나무농원을 둘러보았다. 어른 키보다 큰 나무들도 있고, 큰 나무들 사이에는 묘목들도 자라고 있었다. 겨울에도 광합성을 해야 자랄 수 있기 때문에 나무들은 햇빛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나는 나무를 보면 아주 가까운 지친(至親)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무로 구들방을 덥혀 겨울나기를 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살아갈 삶의 원리를 나무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리.
“나무는 내게 언제나 사무치는 설교자였다. 나무와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 나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경험한다. 나무는 교훈이나 비결을 설교하지 않는다. 삶의 가장 근원적인 법칙을 노래할 뿐이다.”
『가문비나무의 노래』란 책을 쓴 마틴 슐레스케는 헤르만 헤세의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나무가 살아가는 원리를 이렇게 쉽게 풀어준다. 뿌리는 나무에 영양을 공급할 뿐 아니라, 나무에서 양분을 얻기도 한다. 뿌리 역시 잎이 만든 영양이 필요하다. 나무는 물관을 통해서는 뿌리로부터 수분과 양분이 올라가고, 바깥쪽 체관을 통해서는 단물이 뿌리 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뿌리가 물을 전달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머금고 있으면 잎은 시들어 버릴 것이고, 잎이 햇빛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달하지 않고 모두 간직하고자 한다면 뿌리가 죽을 것이다. 얻기만 하고 내주지 않는 태도는 자신을 죽이는 길이다.
이것이 어디 나무에만 해당하는 삶의 원리일까. 뿌리와 잎이 자기 본질에 충실하여 상대에게 자기의 것을 내어주듯이 인간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려면 지구 생명들이 서로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음을 자각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식물들은 언제나 자신의 건강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의 화학물질을 만들어내어 다른 생명을 보살핀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한동안 나무농원 앞에 앉아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봄맞이 하러 나온 듯이 지저귀는 텃새들과 푸른 나무들이 전해주는 영양가 높은 행복 에너지가 내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진하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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