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21세기 밸런스 게임
여기서 관점의 차이를 깨달았다. 내가 친구에게 던진 물음은 ‘166cm의 만성 소화불량’ vs. ‘161cm의 강철 위장’.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르는 밸런스 게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미 전자의 상태로 본인의 삶을 건사해 온 그에게는 신장 5cm(이미 갖고 있는)를 잃고 위장 건강(가져본 적 없는)의 세계를 상상하는 문제였다. 내게는 만성 소화불량이라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느껴졌지만 그에게 소화불량은 미지의 고난이 아니라 익숙하게 관리 가능한 상태이고, 166cm로 살아온 자만이 알 수 있는 (나는 알 수 없는) 이점을 저버릴 정도의 곤란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슷한 밸런스 게임을 내게도 적용해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내가 가진 저주받은 체질을 완전히 없애준다 해도 나는 내 키를 단 2cm도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다 깨달았다.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때의, 이 체질이 아닌 삶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불편이 없을 때의 좋음조차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상된 것, 겪어보지 못한 것에 실질적 가치를 매기기란 쉽지 않다. 물론 건강 체질이 된다면 좋겠지만 무언가를 확실히 내놔야 한다면 ‘그냥 이렇게 살래’라는 강렬한 안주 욕구. 하지만 누군가는 매우 의아할 수도 있다. ‘저런 상태로 계속 살겠다니 딱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누리던 작은 것을 포기하는 일이 누려보지 못한 큰 것을 상상하는 일보다 어렵다. 아마 모든 사회변화 운동이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도 이런 이유일지 모르겠다. 예컨대 평등한 조직문화가 발달하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쌓여도 그런 조직문화를 누려본 적 없는 사람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투자하는 것이 손해라고 느낀다. 겪어보지 않은 행복을 모르기에 고작 1cm의 이점이라도 이미 손에 쥔 것을 붙잡게 된다. 민주주의나 성평등 가치에 대한 반동(백래시), 친환경 정책에 대한 반동(그린래시)의 문법도 여기에 기초하는 듯하다. 사회 각계각층의 백래시와 더불어 그린래시 또한 지난해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확산 중이다. 영국은 노후한 공해 차량에 벌금을 물리는 제도가 과격 반발 시위를 맞닥뜨렸고, 네덜란드 · 독일 · 미국 등에서도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극우 정당들이 지지를 얻고 있다. 아무도 파괴된 지구와 자연재해를 원치 않을 텐데 놀랍게도 이를 완화하기 위한 규제와 정책에는 반발이 거세다. 당장 요구되는 변화와 비용을 명백한 ‘내 손해’로 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과 장기 공생해서 미래 사회를 살아가는 누군가는 현재의 인류를 보면서 ‘어리석고 딱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택배를 하루 만에 받는 편리를 위해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고 건강권을 포기한 시대’와 같이 조롱당할지도 모른다. 사회 시스템이 한계에 달했다는 연구들이 이미 이렇게 많음에도 ‘그냥 이렇게 살래’라며 미적거렸던 21세기 사람들에게 의문을 품으면서 말이다.
좀 더 나은 미래는 막연하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과 평등 같은 문제는 공상적 밸런스 게임과는 다르다. 불평등으로 인한 착취나 기후 위기는 절대 다수 인간의 현실이다. ‘몇 센티미터까지 양보할 수 있겠냐’며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방향을 틀어야 하는 문제다. 모두의 현실임에도 개선된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기를 게을리하는 데는 명백히 이권이 개입한다. 기후 · 생태 활동가이자 작가인 김한민은 이 문제를 ‘지휘관의 전역 후에 터지는 폭탄’에 비유했다.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전역할 지휘관에게, 즉 한시적 권력을 누리고 물러날 정치가에게 미래와 생존을 온전히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래시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한 정치 행동이다. 여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상상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거센 백래시의 시기, 부디 정신 차리고 살아보자는 인사를 지인들과 나누며 새해를 시작했다.
이두루
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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