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한 적 없는 임원들 [김선걸 칼럼]
사모펀드(PE)는 자본을 투자해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거나 경영권을 획득한다. 기업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다.
최근 한 PE 대표가 한국 기업에 투자하며 느낀 점을 얘기했다. “고위 임원이나 심지어 최고경영자(CEO)를 거친 분 중에서 한 번도 경영상의 큰 결정을 해본 적 없는 분이 꽤 많더라고요. 대기업, 중견기업 다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오너가 시키는 일만 하는 거죠.” 한마디로 심부름꾼 역할만 하는 임원이나 CEO가 꽤 된다는 말이다. 미국, 유럽 등에 비해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재벌(Chaebol)’이라는 단어를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시킨 기적 같은 한국 경제 개발에는 이런 가부장적인 응집력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다 쳐도 아직도 그렇다는 건 난센스다. 창의성과 다양성의 시대에 국내 기업만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최근 ‘황제 출장’ 논란이 있는 포스코 사외이사들의 행태가 회자됐다. 1년에 12번 회의 참석하고 1억500만원의 연봉을 받았으니 한 번 회의에 900만원가량 받은 셈이다. 5박 7일 출장서는 1인당 하루 175만원의 5성급 호텔에 묵고 한 끼에 2000만원대 식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이들이 맡은 임무에는 충실했을까.
지난해 상반기 국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던진 반대표는 전체 투표의 0.4%라고 한다. 반대가 한 차례도 없었던 기업이 100곳 중 91곳이다. 견제도 감시도 없이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뜻이다.
100대 기업 사외이사는 구성 자체가 교수가 50%, 관료가 30%를 차지한다. 특히 관료 포함 법조인들이 20% 가까이 된다. 사외이사들을 대관 창구나 법적 분쟁의 방탄 역할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실제 대주주가 송사 중인 한 대기업은 사외이사의 30%가 법조인이다. 미국 주요 기업 사외이사가 기업인들인 모습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KT의 이사진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노무현정부 ‘왕특보’로 불렸던 이강철, 역시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대유 등 문재인정부 낙하산 인사로 이사진을 채워놓고 구현모 전 사장은 연임을 노렸다. 이런 인선이 용납된 것이 더 놀라웠다.
우리 정치권 모습도 흡사하다. 총선이 다가오자 여야 공히 권력 친위 세력의 목소리가 커진다. ‘친윤’ ‘친명’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권력 주변을 맴돌며 개인의 이권을 노리는 이들이 국회의원이나 정당인 등 공공선을 추구하는 위치에 있는 건 어색하다.
‘아무도 모르게 덮고 가자’는 사람들은 늘 있다. 정부든, 당이든, 기업이든 이들이 득세하면 썩기 시작한다. 그 결과는 어떨까.
2001년 엔론 스캔들은 미국 재계 7위였던 텍사스의 거대 에너지 기업이 파산한 사건이다. 임직원들이 회계를 조작해 수천억원의 보너스를 받고, 회계감사를 맡은 아더 앤더슨은 묵인했다. 회계장부는 모두 거짓이었다. 임직원 2만여명의 거대 기업이 순식간에 파산해버려 젊은 세대는 엔론이라는 이름도 잘 모른다.
글로벌 1위 자동차 업체 토요타는 지난해 말 또다시 ‘성능 조작 스캔들’에 휘말렸다. 자회사 다이하쓰에 이어 이번에는 토요타의 창업 회사 격인 토요타자동직기다. 상명하복의 문화 속에 수십 년을 덮어왔다는 사실이 세계에 충격을 줬다.
저수지의 물이 빠지면 누가 수영복을 벗고 있는지 드러난다. 권력을 가진 순간 역사의 교훈을 떠올려야 한다. 달콤한 보고만 하는 부하가 있는가? 바로 그가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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