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결실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 [CEO 라운지]
삼성그룹의 바이오 사업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위탁생산(CMO)이 주력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개발을 담당하는 삼성바이오에피스다.
모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비해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창립 12년 만에 연간 매출 1조원 벽을 넘어서면서 삼성바이오에피스에 대한 기대감이 부쩍 커졌다. 영업이익도 2054억원에 달한다. 글로벌 수준 경쟁력을 갖춘 바이오시밀러 개발·판매 회사가 된 셈이다.
고속 성장 뒤에는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61)의 리더십이 자리한다는 평가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분자유전학 박사 출신으로 바이오 벤처기업 근무 후 2000년 삼성종합기술원에 입사해 바이오헬스랩장 등을 역임한 고 사장은 삼성바이오에피스 창립 후 12년 동안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켰다. 삼성그룹 대부분 계열사 대표들이 2년 또는 4년마다 교체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그만큼 내부 신뢰가 두텁고 바이오 사업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평가다.
시장에서는 삼성그룹 바이오 사업 개국공신 고 사장과 삼성바이오에피스의 넥스트 스텝에 주목한다.
아직 ‘신약’ 관련 구체적인 비전을 공식화한 적은 없지만,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앞으로는 신약 개발에 집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바이오시밀러 시장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 구조적 한계를 고려하면 신약 개발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예상이다. 또 수년간 자본력과 기술력을 쌓은 만큼 지금이 신약 개발에 도전할 적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저가 전략’ 빛 봤다
바이오시밀러 개발 기업은 막대한 임상 비용과 초기 연구개발(R&D) 비용 부담이 크다. 잘 만들더라도 시장 진입이 쉽지만은 않다. 이 때문에 단기간에 대규모 매출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설립 12년 만에 매출 1조원 벽을 뛰어넘었다. 바이오시밀러와 위탁개발생산(CDMO)을 병행하는 셀트리온을 앞선 속도다. 2002년 설립된 셀트리온은 2019년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업계 전문가들은 삼성바이오에피스 주요 바이오시밀러 파이프라인 대부분이 상업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삼성바이오에피스의 휴미라(성분명 아달리무맙) 바이오시밀러 ‘하드리마’를 주목하는 이가 많다. 휴미라는 미국 애브비가 개발한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다. 세계 매출 1위 의약품으로 잘 알려졌다. 지난해 7월 특허가 만료됐고, 이후 삼성바이오에피스와 셀트리온 등 글로벌 빅파마 8개 회사가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경쟁에 참전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시장을 ‘1% 점유율의 경쟁’으로 부른다. 가격 정책 등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점유율 1%만 확보해도 수천억원대 매출이 발생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 하드리마는 현재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지난 1월 17일 공개한 ‘2024년 1분기 미국 바이오시밀러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12월 기준 하드리마의 미국 처방실적 점유율은 0.8%다. 하드리마는 2위 미국 암젠(암제비타, 0.7%)과 스위스 산도스(하이리모즈, 0.3%) 등을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 오리지널 휴미라의 점유율은 분기마다 조금씩 떨어져 지난해 12월 기준 97%로 나타났다.
하드리마 선전 배경에는 차별화된 ‘가격 정책’이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미국 현지 파트너 오가논은 하드리마 제조사도매가격(WAC)을 오리지널 휴미라 대비 85~86% 낮은 수준으로 가격 책정했다. 새롭게 열린 시장 선점을 위해 공격적 전략을 취한 셈이다. 위해주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바이오에피스 휴미라 시밀러의 경우 낮은 도매가 전략으로 미국 시장 내 점유율이 빠르게 성장했고, 우수한 사업 성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가격 정책은 경쟁사들의 고가 전략과 상반된다. 예를 들어 셀트리온의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유플라이마 WAC는 오리지널 대비 5% 낮은 수준이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리베이트가 합법이다. 대형 처방약급여관리업체(PBM) 등에 더 많은 리베이트를 주기 위해 고가 전략을 펼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련 업계는 올해를 기점으로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침투율이 높아질 것으로 내다본다. 의약품 조사분석 기업 클래리베이트 등은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점유율이 서서히 높아져 2031년 64%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바이오에피스와 하드리마 입장에선 추가적인 매출 확보 기회가 놓여 있는 셈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 내부에서도 올해 말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하드리마 매출 확대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한다.
삼바 고객사 이해 상충 해결 과제
이제 시장 관심은 고 사장과 삼성바이오에피스 넥스트 스텝으로 쏠린다. 관련 업계 관계자들은 ‘신약 개발’에 힘을 줄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한계가 뚜렷하다. 약가는 오리지널 의약품 대비 저렴할 수밖에 없고, 개발 가능한 제품도 한정적이다. 최근에는 경쟁까지 치열해진 상태다. 삼성바이오에피스가 또 한 번의 퀀텀점프를 원한다면 신약 개발에 뛰어드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통해 자본력과 기술력이 축적된 만큼 기본기도 탄탄한 상태다.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신약에 관심을 갖는 건 분명해 보인다. 특히 항체-약물접합체(ADC) 부문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ADC는 한마디로 유도탄 방식의 항암 치료제다. 암세포를 찾으려는 ‘항체(Antibody)’에, 특정 암세포 항원 단백질을 공격하는 ‘저분자 세포독성약물(Cytotoxic Drug)’을, ‘화학적 결합(Conjugation)’시킨 구조다.
삼성바이오에피스의 ADC 관심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물산 등과 함께 출자한 1500억원 규모 ‘삼성 라이프 사이언스 펀드’를 활용해 지분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 4월에는 스위스 ADC 기술 개발사 아라리스바이오텍에 투자했다. 아라리스는 단일 공정만으로 항체와 결합이 가능한 ‘링커’ 기술을 보유한 업체다. 지난해 9월에는 국내 ADC 개발사 에임드바이오에 투자했다.
최근에는 창립 후 첫 공동연구 계약도 체결했다. 지난해 12월 국내 바이오 기업 인투셀과 ADC 분야 개발 후보물질 검증을 위한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했다. 인투셀은 레고켐바이오 공동창업자 겸 최고기술책임자(CTO) 박태교 대표가 2015년 설립한 바이오벤처다. ADC 핵심 요소인 링커 부문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했다. 지난해 1월에는 스위스 ADC테라퓨틱스와 ADC 플랫폼 물질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본격적인 신약 개발에 뛰어들기 위해 해결해야 할 지점도 있다. 특히 삼성그룹 바이오 사업의 구조적 문제점이 걸림돌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 모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고객사의 의약품을 CDMO한다. 이 과정에서 고객사의 민감한 정보를 접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CDMO 기업이 신약 사업을 동시에 하는 건 금기에 가깝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신약 개발 주체가 되더라도 삼성바이오로직스 고객사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고 사장이 이 같은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업계 시선이 쏠려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6호 (2024.02.07~2024.02.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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