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긍정을 퍼트려 봐"…강진 1년, 이 나라 소녀가 입은 옷 [튀르키예 강진 1년]
'긍정을 퍼트려 봐~'
마을에 빼곡하게 들어찬 컨테이너 무리에서 나온 해맑은 얼굴의 소녀는 이런 한국어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난 3일(현지시간) 오후 튀르키예 말라티아주(州) 예실리우르트에 자리한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에 들어서자 4~6살 가량의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반겼다. 중앙일보를 포함한 국제기자단 앞에서 자전거 곡예를 하거나, 악수를 해달라는 아이들을 보면 이곳이 큰 재난이 덮친 마을이라는 게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지난해 2월 6일 튀르키예 남부를 뒤흔든 규모 7.8의 강진은 무려 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자연재해의 위력에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주민들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후 1년,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을 누비는 4살 소녀 미레이가 입은 한글 티셔츠 속 메시지처럼 이곳 사람들은 긍정의 힘을 믿고 있는 듯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말라티아, 아디야만, 가지안테프, 하타이, 카라만마라슈 등 피해지에 414개의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을 조성했다. 이재민들은 총 21만5224개의 좁은 컨테이너 집에 나눠 살면서 심리치료와 교육, 직업훈련 등을 병행하며 일상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예실리우르트 임시 정착촌에서 만난 찰나(15)와 유수프(16)는 "여기서 생활한 지 6개월이 됐는데, 이젠 여기서 지내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밝은 미소와 달리 겨울을 나기엔 다소 얇은 듯한 옷차림과 넉넉지 못한 세간이 눈에 띄었다. 공용 수도에서 식수를 나르고, 구호 물품으로 나온 빵과 음식을 거처로 옮기는 노인과 아이들의 모습에선 컨테이너 생활의 어려움이 묻어났다.
지진으로 조카를 잃은 에미네(44)에겐 여전히 1년 전 그날의 비극이 생생하다. 지진 당시 임신 중이었던 그는 세 자녀와 집밖으로 급히 대피해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는 "지진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지진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토로했다.
이재민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케이(K)-팝과 K-드라마 등 한국의 문화 콘텐트가 주는 작은 행복감이었다. 임시 정착촌에서 만난 이재민들은 기자가 지닌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을 보고 너나 없이 한국 얘기를 꺼내느라 바빴다. 아이돌그룹 BTS와 스트레이키즈에 흠뻑 빠져 있다는 10대 소녀, 튀르키예 프로축구팀 페네르바체에서 뛰었던 국가대표 선수 김민재와 프리미어리거 손흥민을 좋아한다는 축구팬까지…. 어떤 이는 유튜브로 관련 영상을 검색해 보여주며 한국을 뜻하는 '코레(Kore)'를 연신 외쳤다.
이들이 머무는 컨테이너촌엔 한국이 건넨 구호의 손길도 녹아 있었다. 대한민국 긴급 구호대(KDRT)가 하타이주 이스켄데룬과 안타키아에서 컨테이너 정착촌 조성에 힘을 보탰다. 구호대는 지난해 강진 직후엔 세 차례에 걸쳐 구조 활동에 나서 8명의 생명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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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 서두르는 튀르키예 정부
컨테이너촌에 살던 이재민들은 이르면 이달부터 튀르키예 정부가 마련한 영구 거주지로 이주할 예정이다. 그간 튀르키예 주택개발공사(TOKI)는 지진 피해가 컸던 11개 주에 85㎡(25평형), 105㎡(31평형) 규모의 5층 아파트와 단층 주택을 집중 건설했다.
다만 취재진이 찾은 말라티아, 아디야만의 영구 주택 단지 주변은 아직 흙 먼지가 날리는 공사판이었다. 튀르키예 정부는 이재민들의 입주를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주 정부 관계자들은 "이르면 이달 말부터 추첨을 통해 입주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도 오는 6~8일 일부 피해지의 영구 주택 단지를 방문해 입주 축하 행사를 진행한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1년 내 20만 개 주택을 짓겠다"고 이재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다 보니 튀르키예 당국은 4~5개월 안에 대부분의 주택을 빠르게 완공하는 '속도전'에 나선 상황이다. 이달 6일까지 이미 완공된 7만5000채에 이재민이 입주할 예정일 정도다.
TOKI 관계자는 "(빠른 속도로 건물을 짓고 있지만) 내진 설계와 보강은 꼼꼼하게 했다"며 "건설 전 토양 지질 검사 등을 실시해 지진 단층을 피해 가는 곳에 영구 주택 단지를 조성했다"고 말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올해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100주년'을 활용해 대외적 이미지 쇄신도 꾀하고 있다. 재건 프로젝트로 대지진 이후 자신의 위기관리 능력과 리더십을 국제사회에 내세울 것이란 관측이다.
하지만 피해 현장에선 강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 창밖에는 지진으로 붕괴됐지만 아직도 철거를 하지 못한 건물과 훼손된 문화유적, 크게 금이 간 건물 벽 등이 간간히 보였다.
튀르키예 정부는 이런 피해지 복구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내다본다. 일례로 튀르키예 대통령 전략예산국이 내놓은 재건 비용 추정치는 1040억 달러(약 140조원)에 이른다. 이는 튀르키예 국내총생산(GDP)의 11%에 달하는 수치다. 튀르키예 경제정책연구재단(TEPAV)은 온전한 재건까지 최소 5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측했다.
말라티아(튀르키예)=김민정 기자 kim.minjeong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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