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해달별, 내 마음에는 나라 사랑 일편단심'
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사회, 문화, 역사, 설화와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스토리텔링으로 간략히 엮어갑니다. <기자말>
[이완우 기자]
▲ 소충사 숭의문 |
ⓒ 이완우 |
聖壽山 在縣東三十里 (성수산 재현동삼십리)
聖跡山初落也 (성적산초락야)
其形特秀 最著靈異 (기형특수 최저영이)
有旱祈雨 必應 (유한기우 필응)
(한문 풀이)
성수산은 임실현 동쪽의 삼십 리에 위치한다.
장수 팔공산(성적산)의 기운이 첫째로 맺힌 곳이다.
산의 형세가 특별하게 수려하고, 영험하며 기이함이 으뜸으로 드러난다.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
구한말 1907년에 성수산 줄기 아랫마을의 29세 청년 이석용(李錫庸. 1877.11.29∼1914.4.4)이 정미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임실, 진안, 장수, 완주, 순창, 남원, 정읍, 장성, 함양 등에서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 소충사 의병 동상 |
ⓒ 이완우 |
소충사, 의병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사우
소충사(昭忠祠,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475)는 구한말 의병 활동 중에 순국한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28 의사를 배향하는 사우(祠宇)로, 성수산에서 직선거리로 7km 거리이다. 소충사에 조성된 의병들의 부조와 동상이 아침 햇살에 빛났다.
이석용 의병장은 국한문 혼용체 가사인 <격중가(激衆歌)>를 지었고, 이석용 의병 부대에서 이 가사를 노래로 불렀다. 100여 년 전 국어로 한문이 섞인 노래 가사이지만, 이석용 의병 부대의 드높은 사기와 애국 충정이 바로 느껴진다.
壯士(장사)가 업실슨야
구름갓지 모야든다
어야 우리 壯士(장사)들아 激衆歌(격중가)를 불러보세
(중략)
우리 百姓保全(백성보전)하여
三角山(삼각산) 숫돌되고 漢江水(한강수) 띠되도록
질기고 노라보새
우리 大韓(대한) 萬萬歲(만만세)
▲ 정재 이석용 의병장 생가 |
ⓒ 이완우 |
의병장 생가터, 굳센 기상이 서린 초가감간
소충사에서 3.5km 거리의 삼봉산(三峰山, 538m) 아랫마을에 자리 잡은 이석용 의병장 생가터(生家址, 성수면 삼봉리 675)를 찾아갔다. 마을의 왼쪽에는 바위 연봉의 고덕산(高德山, 625m)이 굳센 기상으로 우뚝 솟아있다. 의병장 생가터에서 성수산까지 직선거리 6km이다.
▲ 임실 대운치 의병 활동 전적지비 |
ⓒ 이완우 |
비오는 날의 전투 현장, 운현전적비
이석용 의병장의 의병 활동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운현전적비(운현전적비, 성수면 태평리 산103)를 찾아갔다. 운현전적비는 임실에서 진안으로 향하는 30번 국도의 대운치 고갯길 옆에 있는데, 성수산에서 직선거리 5km로 가까운 위치이다. 대운치 고개는 성수산에서 삼봉산과 고덕산을 잇는 산마루를 넘어가는 고갯길인데, 30번 국도를 타고 성수산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성수산 삼거리에서 진안 방향으로 2km 거리이다.
이석용 의병장은 정미조약(丁未條約, 1907.7.24)이 맺어지자, 의병 활동을 준비하고 8월 27일에 성수산 상이암에서 종일 의병 활동을 구상하였다. 9월 2일, 그는 의병 참모들과 의논하여 의병대 이름을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고 정하였다.
9월 4일에 이곳 대운치 부근에 처음으로 의병 20여 명의 의진(義陣, 의병의 군진)을 주둔하였다. 9월 12일에 마이산 남쪽 기슭 용암(龍岩)에 높은 단을 쌓고 의병과 군중 등 천여 명이 모여서 호남창의의병단 결성을 하늘에 알리는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였고, 이석용은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1908년 3월 21일 비 오는 날 앞뒤 거리가 분간이 안 되는 날씨에 이석용과 의병들이 대운치 고개를 넘으며 휴식을 하는데, 추격한 일본군 부대의 공격을 받아 전투가 발생하였다. 이날 전투로 16명의 의병이 사망하였다. 이석용 의병 부대가 처음으로 군진을 펼쳤던 이 고개에서, 의병 활동 시작 7개월 후에 한 곳에서 많은 의병들이 피해를 본 안타까운 전투였다.
▲ 의병의 길, 성수산 성문동 고갯길 계곡 |
ⓒ 이완우 |
성문동 계곡 고갯길, 의병 부대의 이동 경로 탐방
성수산의 성문동 계곡을 찾아 너덜 바위와 잔설이 쌓인 계곡의 고갯길 흔적을 찾아 올라갔다. 이석용 의병 부대는 이곳 성문동 계곡을 타고 구름재를 넘어 장수와 진안 지역을 오갔다.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 활동을 기록한 일기인 '창의일록(倡義日錄)"에 이석용 의병 부대의 유진(遊陣) 활동(1907~1908)과 일본군과의 14회 전투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석용 의병 부대는 임실을 중심으로 인근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병 부대의 활동을 하였다. 의병 부대가 행진하고 숙영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군의 추적을 피하였다. 의병 부대는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위험했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목표를 찾아 가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석용 의병장이 발표하고, 실행한 '의진약속(義陣約束)'과 '의령10조(義令十條)'가 있다. 그는 '의진약속'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며, 일본 상품을 배격하고, 인물 본위로 모병하며, 무기 제조 기술자를 영입하고, 푸른색 군복 착용하며, 간략한 군례(軍禮)를 이행하고,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을 처단하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고, 민폐를 근절할 것 등을 내세우고 실행하였다.
'의령10조'에서는 근왕사(勤王事, 국가와 임금에 충성한다), 정명분(正名分, 명분을 바르게 한다), 안민심(安民心, 민심을 안정케 한다), 족군용(足軍用, 의병의 재정과 전곡을 충족시킨다), 출기계(出器械, 좋은 무기를 마련한다), 정공상(定功賞, 공을 이루면 표창한다) 등을 내걸고 실천하여 충실한 의병 활동을 하였다.
▲ 의병의 길, 성수산 성문동 고갯길 폭포 |
ⓒ 이완우 |
성수산, 호국 정신이 살아 있는 산으로 새롭게 인식하다
성수산을 올라가며 구룡쟁주 명당을 이루는 여러 산줄기와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 활동을 구상하였던 상이암을 바라보았다. 상이암(上耳菴)에서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여름에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무기를 조달했으며 인근 지역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일제의 의병 활동에 대한 대응과 작전이 강화되면서 어려움을 겪은 이석용 의병 부대는 1909년 3월 6일에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하였고, 이석용 의병장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을 건너가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 일편단심의 구국 정신으로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활동하다가, 1912년 10월 1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대구의 감옥에서 지은 마지막 한시에는 그의 불꽃 같은 생애와 조국 독립의 충정이 담겨 있다.
天上三光白 (천상삼광백)
胸中一片丹 (흉중일편단)
하늘에는 해와 달, 별빛이 밝고
내 마음에는 (나라 사랑) 일편단심이네
1914년 4월 28일 정오, 이석용 의병장은 조국광복의 염원을 외치며 대구형무소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殉國)하였다. 그는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 호국의 산, 임실 성수산 |
ⓒ 이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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