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얇은 나도 겁 없는 큰손이 되는 곳

임태희 2024. 2. 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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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헌책방에서 고른 책 111권... 전부 계산해도 12만 원을 넘지 않다니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임태희 기자]

어제 장을 보러 가서 사과 한 알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카트에 얼마 담지도 않았는데 계획한 예산을 이미 초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고물가 시대라지만 먹는 것까지 아껴야 한다니.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아이를 마냥 집에서 놀리고 있다. 올해 초등 4학년에 올라가지만 아직 학원에 보낸 적이 없다. 엄마와 함께 수학 문제집을 하루 한 장씩 풀고 영어 그림책을 일주일에 한 권 반복해 읽는 것이 우리 아이가 하는 공부의 전부다.

학원비가 부담스러워 내가 직접 아이와 이마를 맞대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며 공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아이 앞에서 문제 풀이를 헤매게 되면 나는 바짝 긴장이 된다. 학원을 알아봐야 할 날이 머지않은 듯해 두렵다. 콕 집어 '학원비'가 두려운 거다.
  
 엄마, 나 심심해!
ⓒ 임태희
 
"심심해~ 심심해~ 심심해~!"

점심을 먹여 놓고 돌아서니 아이가 노래를 부른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가 염려스러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라디오를 함께 들었다. TJB 대전방송에서 <두 시 탈출 컬투쇼>가 나오고 있었다. 재미난 사연에 배꼽을 잡고 방바닥을 뒹굴며 깔깔대다 보니 두 시간이 그야말로 '순삭'되었다. 아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간식거리를 챙기기 시작한다.

이럭저럭 시간이 흘러 잠잘 때가 되니 오히려 반갑다. 더 이상 심심하다는 항의를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아이 방에 불을 꺼주고 나오는데 등 뒤에서 '○○탕후루' 노랫소리가 들린다. 자려고 누워서 하루를 돌아보니 낮에 라디오에서 들은 그 광고 음악이 가장 재미있었나 보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도서관에 가자고 하니 아이가 몸을 배배 꼬며 말한다.

"난 빌려서 보는 것보다 내 책을 보는 게 더 좋은데...."

워낙 순해 자기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이가 수줍게 말하고 있었다. 흘려들어선 안 될 말 같았다.

"도서관 가기 싫어? 그럼 그냥 집에 있는 책 볼까?"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책장을 손으로 훑으며 조그맣게 말한다.

"집에 있는 책은 다 본 거야. 저 윗칸에 있는 과학책은 너무 어렵고...."

'아, 엄마가 새로 사준 책을 집에 두고 보고 싶은 거구나...!'

반드시 살펴주어야 하는 아이 마음이라 생각되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주말에 책방에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하니 아이가 방방 뛴다.

며칠 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네가 보고 싶은 책 전부 다 골라."

그렇게 아이가 골라온 책이 모두 111권이었다. 나는 책방 주인께 가격을 당당히 여쭤 보았다.

"모두 다 해서 111,000원입니다."

우리가 간 곳은 청주에 있는 한 대형 헌책방이었다. 단행본은 균일가로 한 권에 1,000원. 몇 년째 가격이 오르지 않고 있어 이곳에만 가면 나는 겁 없는 큰손이 된다. 집으로 돌아와 수건으로 책에 묻은 먼지를 닦아 쌓아 놓으니 아이 키보다 크다. 책을 닦는 일이 조금 귀찮긴 하지만 새책 같은 헌책 상태에 기분이 마냥 좋다.
 
 헌책방에서 사 온 책 111권. 쌓아 놓으니 아이 키보다도 더 크다.
ⓒ 임태희
 
집에서 기사를 쓰고 있으면 한시도 쉬지 않고 내게로 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장난을 걸던 아이가 오늘은 조용하다. 아이를 찾아 거실로 나가 보니 엄마가 간식으로 쪄준 호빵을 먹으며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책상으로 돌아와 쓰던 원고를 마무리했다.

그날 밤 잠자리 인사를 하려고 아이 방으로 가니 아이가 동화책 한 권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엄마도 이 책 꼭 읽어봐."
"왜? 그 책 재밌어?"
"중간에 조금 슬픈 장면이 있긴 한데 마지막에 엄청 감동적이야."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하는 아이에게, "그러마"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아이는 새책이든 헌책이든 상관없이 책 속 세상과 이야기를 새롭게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헌책값이 아직 오르지 않아 얼마나 감사하던지. 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한번 더 마음을 다졌다.

조용히 아이 방 문을 닫아주고, 일을 좀 더 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언젠가 여유롭게 돌아볼 날이 올 거라 믿으면서 나는 스탠드 불빛을 환하게 밝히었다.
 
 좋은 날 오겠죠? 오늘도 힘 내세요!
ⓒ 임태희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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