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라디오 DJ는 안 된다'던 BBC의 황당한 이유
[염동교 기자]
▲ 애니 나이팅게일을 추모하는 케미컬 브라더스의 인스타그램 갈무리. |
ⓒ 인스타그램 |
지난 1월 13일, 영국의 대표적인 전자음악 듀오 케미컬 브라더스는 SNS에 애니 나이팅게일(Annie Nightingale)을 추모하며 이렇게 썼다. 11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난 애니 나이팅게일은 대영 제국 훈장 사령관(CBE)을 받을 만큼 사회와 문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영국 방송인이다. '최초의 BBC 라디오 여성 진행자', '기네스 레코드 선정 가장 오랜 경력의 여성 라디오 진행자' 나이팅게일은 자신을 둘러싼 두터운 장벽을 확고한 주체성으로 극복해 나갔다.
유리천장
1960, 1970년대의 영국엔 여성 디스크 자키(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전무했고 실력과 열정으로 가득 찬 나이팅게일도 수차례 선입견에 가로막혔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미디어 영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나이팅게일은 인기 방송국이었던 라디오 캐롤라인(Radio Caroline)의 디스크 자키 직함을 얻으려 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에 여성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BBC 방송국 간부로부터 "디스크 자키는 (여성 청취자들에게) 남편의 대체자 역할이기에 여성 디제이는 안 된다"라는 황당한 성차별적인 이유로 거부당하기도 했다. 1970년 BBC 라디오1에서 영국의 첫 번째 여성 디제이로 나이팅게일을 선정한 이후, 다음 주자인 재니스 롱(Janice Long)까지 12년이 걸릴 만큼 견고한 성차별이었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 나이팅게일은 BBC 라디오 방송국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진행자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재니스와 로런 라번(Lauren Laverne) 등 후배 여성 진행자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The Old Grey Whistle Test)
20세기 록 뮤직의 팬이라면 익숙한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는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방영된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 프로그램이다. 1978년 밥 해리스(Bob Harris)의 바통을 받은 나이팅게일은 해리스 시절의 전통주의적 블루스 록과 컨트리에서 벗어나 갱 오브 포와 토킹 헤즈, 아담 앤 더 앤츠와 같은 급진적 포스트 펑크 밴드를 소개했다.
1970년대 말부터 신시사이저로 대중음악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뉴웨이브'의 시대적 맥락은 나이팅게일의 실험주의, 개방주의와 맞물려 미래의 뮤지션과 대중들에게 신선한 음악적 세례를 안겨줬다. 1980년 존 레논 사망 이후 방송된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의 '존 레논 특집'은 그의 삶과 경력에 대한 많은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이팅게일의 감식안은 대중음악의 시대성과 역사성을 반영했다.
애니 나이팅게일 이터널 주크박스(Annie Nightingale's Eternal Jukebox)
2012년 BBC 라디오 2에서 <애니 나이팅게일 이터널 주크박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주로 휴일에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청취자들의 제안과 나이팅게일의 맞춤 선곡'으로 이루어졌다. 다채로운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곡 간의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통찰력까지, 일흔을 넘긴 고령에도 음악을 향한 애정을 여과 없이 분출했다.
2020년 방송 활동 50주년을 맞은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멀티미디어 엔터테인먼트 회사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Ministry of Sound)의 주도 하에 롤링 스톤스와 폴 매카트니의 곡을 담은 컴필레이션을 발매했다. 모음집 음반에 쉽게 곡을 내주지 않는 두 거장도 나이팅게일 관련 작업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BBC TV에선 50주년 관련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고, 밥 말리와 더스티 스프링필드부터 빌리 아일리시와 리틀 심즈까지 수많은 뮤지션에 관한 인터뷰 모음집도 발간되었다. 뮤지션과 친구가 되는 걸 기피했던 전설적인 음악 평론가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와 달리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나이팅게일은 아티스트의 깊은 속내를 끌어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 BBC 라디오1에서 애니 나이팅게일을 추모하기 위해 올린 아카이브 음성 페이지 갈무리 |
ⓒ BBC |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진행했던 <선데이 애프터눈 리퀘스트 쇼>(Sunday Afternoon Request Show), 1979년부터 1982년까지 듀란, 더 후 같은 영향력 있는 뮤지션을 초빙한 <프라이데이 나이트 뮤직 채트 쇼>(Friday Night Music Chat Show) 등 1970년대 내내 가열찬 행보를 이어갔다.
1980년대 후반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에 환멸을 느껴 잠시 라디오계를 떠난 나이팅게일은 애시드 하우스에 빠지게 된다. 환각적 사운드스케이프를 모태로 하는 시카고 애시드 하우스에 영감 얻은 영국의 하우스 물결은 레이브(Rave)란 이름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스페인 근처 지중해의 섬 이비사(Ibiza)의 향락적 파티와도 연관된 이 사조는 해피 먼데이스와 프라이멀 스크림같은 1990년대의 영국 록밴드를 감화했고, 3~4분대 규격화된 팝송과 달리 연주를 길게 늘어뜨려 환각성을 충분히 부여하는 긴 곡들이 늘어났다.
변화에 발빠르게 감응했던 나이팅게일은 BBC 라디오 1의 주말 저녁으로 자리를 옮겨 클럽 디제이처럼 영국산 애시드 하우스 뮤직을 플레이했다. 케미컬 브라더스의 회고처럼 나이팅게일의 선구안은 영국 대중음악을 선도했고 그의 노쇠하지 않은 감각은 21세기 이후에도 이어졌다.
최애곡 13선
< The Quietus > 소속 저널리스트 디바 해리스(Diva Harri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가장 사랑하는 13곡'은 나이팅게일의 너른 취향을 다시금 드러낸다. 1980, 1990년대 유행했던 영국 얼터너티브 댄스 장르였던 배기(Baggy)를 구사한 플라워드 업의 실험적인 13분짜리 곡 'Weekender'와 레이브 찬가 'Loaded'의 주인공 프라이멀 스크림의 'Higher Than The Sun (The Orb Mix)'는 4번째 키워드인 애시드 하우스 신을 관통한다. 나이팅게일은 영국 일렉트로니카 그룹 언더월드와 영화 음악가 대니 보일이 협연한 2012년 런던 하계 올림픽 개막식 공연을 영국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들기도 했다.
나이팅게일이 가장 사랑하는 13곡 |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 Trans Europe Express 플라워드 업(Flowered Up) - Weekender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 - Higher Than The Sun (The Orb Mix) 데이브(Dave) - Funky Friday 시드 비셔스(Sid Vicious) - My Way 에릭 사티(Eric Satie) - Trois Gymnopédies 존 레논(John Lennon) - Steel And Glass 스크릴렉스(Skrillex) - Scary Monsters And Nice Sprites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 Scary Monsters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 Space Oddity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Bob Marley & The Wailers) - Three Little Birds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 - Bury a Friend 에미넴(Eminem) - Lose Yourse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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