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가면 좋을 오키나와 이야기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4. 2. 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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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의 끝

[김찬호 기자]

가고시마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버스로 40분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랜만에 오는 공항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더 서남쪽, 오키나와로 향합니다. 한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도착했습니다. 겨울이지만 나하의 기온은 20도가 넘습니다. 해도 여전히 따갑습니다.

시내의 상황도 일본 본토와는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부실한 대중교통망이 눈에 띄었습니다. 철도 대국 일본이지만, 인구 120만의 오키니와섬에는 17km 길이의 모노레일 외에는 철도가 없습니다.
 
 오키나와 모노레일
ⓒ Widerstand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오키나와는 오랜 기간 일본과는 다른 문화권을 꾸리고 있었으니까요. 오키나와가 넓은 의미의 일본 문화권에 속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과 꾸준히 영향을 주고받기에는 지리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죠. 
오키나와 제도는 오키나와섬을 비롯해 여러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그 섬을 하나하나 통제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오키나와 제도 남쪽의 이시가키는 오히려 타이완섬과 훨씬 가까울 정도입니다.

오키나와에는 11세기부터 다양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은 차츰 통합되어, 14세기에는 세 개의 국가가 남게 됩니다. 북산국, 중산국, 남산국이었죠.

오키나와는 이 시기부터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세 나라 모두 중국에 책봉을 받기도 했죠.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조공과 책봉을 피했던 일본 본토와는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1429년, 중산국에 의해 세 나라가 통일됩니다. 당시에는 이 나라를 류큐(琉球)라고 불렀죠. 류큐 왕국은 조선과 명, 일본을 중개하는 무역으로 크게 발전합니다.
 
 나하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국왕 초상
ⓒ Widerstand
영광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1609년, 임진왜란 당시 협조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류큐를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개무역으로 번성한 류큐의 부를 노린 것이었겠죠. 류큐 정벌에는 가고시마(鹿児島), 당시 이름으로는 사쓰마(薩摩)가 앞장섰습니다.
사쓰마는 두 달 만에 류큐를 정복했습니다. 사쓰마는 류큐 국왕을 압송해 데려왔습니다. 류큐는 사쓰마의 영원한 속국이 되겠다고 약속했죠. 이후 류큐는 형식적으로는 존속했습니다. 일본은 류큐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류큐가 청나라에 조공을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조공 무역의 이익은 모두 사쓰마가 가져갔죠.
류큐는 그렇게 260여 년을 사쓰마의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그 사이 류큐의 주민들이 겪었을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사쓰마는 류큐 주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매겼고, 이를 납부하지 못하면 노예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농민이 사탕수수 재배에 강제 동원되었고, 그 이익은 사쓰마에 돌아갔습니다.
 
 오키나와의 무역선
ⓒ Widerstand
류큐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형식적인 독립국 지위를 이어갔습니다. 일본이 개항할 때, 류큐 역시 미국이나 프랑스 등과 따로 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국가로 향하는 일본에게, 류큐의 애매한 위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1872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 왕국을 일본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하는 ‘류큐 처분’을 내렸습니다.
류큐는 청나라에도 조공하고 있었으니, 이 처분에는 청나라도 반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은 이 문제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류큐는 끝내 일본에 병합됩니다. 1879년 일본은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류큐 번주를 맡고 있던 마지막 류큐 국왕 쇼 타이(尚泰)는 도쿄로 압송됐습니다.
 
 슈리성
ⓒ Widerstand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류큐는 일본의 첫 번째 식민지였습니다. 일본은 그 식민지를 병합하면서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죠. 그러니 다음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대만과 조선을 차례로 병합한 일본은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 길의 끝에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파시즘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만주를 침공했고, 곧 중국과도 전쟁을 벌였습니다. 1941년에는 끝내 미국과 전쟁을 벌였죠.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944년, 일본의 패망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은 사이판과 괌을 차지했고,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4년 10월부터 미군은 오키나와 일대에 막대한 공습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오키나와 상륙을 시작했죠. 하지만 전쟁은 미국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동원해 전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패배하면 집단 자살을 강요했죠. 오키나와라는 ‘식민지’의 주민은 손쉽게 희생의 대상이 됐습니다. 오키나와 전투 과정에서 민간인 8만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수치였습니다. 집단 자살과 공습으로 오키나와섬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의 피해를 목격한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직접 상륙 대신, 새로운 무기를 동원하기로 한 것이죠. 그것이 원자폭탄이었습니다.
 
 슈리성의 정전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 Widerstand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쇼와 덴노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오키나와는 미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민정부에서 오키나와 행정을 담당했죠.
지금 오키나와의 모습이 일본과 많이 다른 것도 이 때문입니다. 폐허가 된 오키나와를 재건한 것이, 일본이 아닌 미국이기 때문이죠. 도시 구조도 많은 부분 미국을 모방해 만들어졌습니다.
오키나와는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됐습니다. 닉슨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총리 사이 합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50년 넘게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남아 있죠.
 
 해양박공원
ⓒ Widerstand
하지만 이 열도의 비극적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여전히 오키나와 본섬 면적의 14%는 미군이 전용 시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가 차츰 반환되면서, 일본의 미군기지 면적 중 70%가 오키나와에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0.6%에 불과한데 말이죠. 
오키나와현의 1인당 GDP는 일본에서 가장 낮습니다. 도쿄의 최저시급이 1,072엔인 데 반해, 오키나와의 최저시급은 853엔으로 전국 최저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오키나와는 장수 지역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2021년 오키나와 남성의 평균 수명은 47개 도도부현 중 36위로 하위권입니다. 빈곤과 생활 양식의 변화가 만든 수치겠죠.
 
 슈레이몬
ⓒ Widerstand
나하 시내에는 오래전 류큐 왕국의 국왕들이 사용했던 ‘슈리성(首里城)’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처음 슈리성에 방문하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일본 성의 양식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죠. 언덕 위에 지어진 구조와, 곡선으로 만들어진 성벽. 건물의 모습과 성으로 올라가는 동선까지도 많은 것이 달랐습니다. 
슈리성의 정전(正殿)은 1945년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습니다. 1989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20년 만인 2019년 1월에야 복원이 완료됩니다. 하지만 복원된 정전은 1년도 되지 않은 2019년 10월 화재로 전소됐습니다. 정전을 포함해 여러 문화재가 화재로 손상되었죠. 결국 복원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상징이었고, 곧 오키나와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도 슈리성의 정문인 슈레이몬(守礼門)은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힙니다. 하지만 류큐의 상징이었던 슈리성 정전은 무너져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복원되고 다시 무너지는,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지어지는 슈리성의 정전입니다. 어쩌면 그조차,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지도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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