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가면 좋을 오키나와 이야기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가고시마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버스로 40분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랜만에 오는 공항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더 서남쪽, 오키나와로 향합니다. 한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도착했습니다. 겨울이지만 나하의 기온은 20도가 넘습니다. 해도 여전히 따갑습니다.
▲ 오키나와 모노레일 |
ⓒ Widerstand |
오키나와 제도는 오키나와섬을 비롯해 여러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그 섬을 하나하나 통제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오키나와 제도 남쪽의 이시가키는 오히려 타이완섬과 훨씬 가까울 정도입니다.
오키나와에는 11세기부터 다양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은 차츰 통합되어, 14세기에는 세 개의 국가가 남게 됩니다. 북산국, 중산국, 남산국이었죠.
오키나와는 이 시기부터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세 나라 모두 중국에 책봉을 받기도 했죠.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조공과 책봉을 피했던 일본 본토와는 대조적입니다.
▲ 나하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국왕 초상 |
ⓒ Widerstand |
사쓰마는 두 달 만에 류큐를 정복했습니다. 사쓰마는 류큐 국왕을 압송해 데려왔습니다. 류큐는 사쓰마의 영원한 속국이 되겠다고 약속했죠. 이후 류큐는 형식적으로는 존속했습니다. 일본은 류큐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류큐가 청나라에 조공을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조공 무역의 이익은 모두 사쓰마가 가져갔죠.
▲ 오키나와의 무역선 |
ⓒ Widerstand |
류큐는 청나라에도 조공하고 있었으니, 이 처분에는 청나라도 반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은 이 문제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류큐는 끝내 일본에 병합됩니다. 1879년 일본은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류큐 번주를 맡고 있던 마지막 류큐 국왕 쇼 타이(尚泰)는 도쿄로 압송됐습니다.
▲ 슈리성 |
ⓒ Widerstand |
대만과 조선을 차례로 병합한 일본은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 길의 끝에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파시즘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만주를 침공했고, 곧 중국과도 전쟁을 벌였습니다. 1941년에는 끝내 미국과 전쟁을 벌였죠.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944년, 일본의 패망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은 사이판과 괌을 차지했고,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4년 10월부터 미군은 오키나와 일대에 막대한 공습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오키나와 상륙을 시작했죠. 하지만 전쟁은 미국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동원해 전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패배하면 집단 자살을 강요했죠. 오키나와라는 ‘식민지’의 주민은 손쉽게 희생의 대상이 됐습니다. 오키나와 전투 과정에서 민간인 8만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수치였습니다. 집단 자살과 공습으로 오키나와섬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 슈리성의 정전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
ⓒ Widerstand |
지금 오키나와의 모습이 일본과 많이 다른 것도 이 때문입니다. 폐허가 된 오키나와를 재건한 것이, 일본이 아닌 미국이기 때문이죠. 도시 구조도 많은 부분 미국을 모방해 만들어졌습니다.
▲ 해양박공원 |
ⓒ Widerstand |
오키나와현의 1인당 GDP는 일본에서 가장 낮습니다. 도쿄의 최저시급이 1,072엔인 데 반해, 오키나와의 최저시급은 853엔으로 전국 최저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오키나와는 장수 지역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2021년 오키나와 남성의 평균 수명은 47개 도도부현 중 36위로 하위권입니다. 빈곤과 생활 양식의 변화가 만든 수치겠죠.
▲ 슈레이몬 |
ⓒ Widerstand |
슈리성의 정전(正殿)은 1945년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습니다. 1989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20년 만인 2019년 1월에야 복원이 완료됩니다. 하지만 복원된 정전은 1년도 되지 않은 2019년 10월 화재로 전소됐습니다. 정전을 포함해 여러 문화재가 화재로 손상되었죠. 결국 복원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상징이었고, 곧 오키나와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도 슈리성의 정문인 슈레이몬(守礼門)은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힙니다. 하지만 류큐의 상징이었던 슈리성 정전은 무너져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복원되고 다시 무너지는,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지어지는 슈리성의 정전입니다. 어쩌면 그조차,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지도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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