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에 참여한 궁녀 고대수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 이병길 |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파들이 청국으로부터의 자주와 근대적 개혁을 내걸고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여기에 여성 한 명이 참여하였다. 보통 여성이 아닌 궁녀였다.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궁녀의 신분으로 일종의 쿠데타라 할 수 있는 정변에 깊숙이 참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 관한 자세한 신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김옥균 등이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장에서 거사 직후 창덕궁 침전에 들어가 고종과 민황후에게 변란이 일어났으니 급히 피신해야 한다고 아뢰는 순간에 침전 인근에서 폭발을 터뜨리는 일이었다.
고종이 갑작스런 변란 소식에 어리둥절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순간 터지는 폭음으로, 위기감에 빠져 그들의 말을 따라 경우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적확하게 화약을 폭발시킴으로써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은 유대치 등 역관 출신, 이동인 등 승려, 서재필 등 사관학교 출신 등이 참여했지만 주로 명문가의 양반출신들이다. 그런데 어떤 경로로 궁녀가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궁녀 고대수(顧大嫂)는 누구인가.
고종의 지밀상궁으로서 남달리 총명하여 왕실의 배려하에 숙명여고를 졸업한 조하서 상궁에 의하면, 고대수는 7척 장신에 힘이 세어 웬만한 남자 몇 명쯤을 너끈히 감당할 정도였으며, 보통 이상의 흉물이라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는 뜻에서 성을 고, 이름을 대수라 했다고 한다.
그는 키가 너무 커서 바지랑대에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지만 궁중의 액막이로 뽑혀 입궐한 무수리였다는 것이다.
조하서 상궁의 증언대로 고대수가 무수리였다면, 그는 궁녀 가운데서도 최하층 신분에 속했던 셈이다. 무수리란 궁중의 각 처소마다 배속되어 잡일을 하는 궁녀를 일컫는다. 수돗물이 없던 시절이므로 전각마다 우물이 있어 물을 길어 먹는데 무수리는 이 물 긷기를 비롯해 빨래, 세숫물 떠올리기, 불 때기 등등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무수리는 다른 궁녀와 달리 선발기준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고 주로 연줄을 통해 입궁하게 되며, 출퇴근 할 수도 있어서 기혼녀도 꽤 있었다고 한다.(박석분ㆍ박은봉, [인물여성사])
갑신정변은 청국군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나고 수구파의 혹독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김옥균을 비롯 주동자 몇 사람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남은 사람과 그 가족들은 잔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뒷날 <갑신일록>에서 화약을 터뜨린 궁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한글 번역)
궁녀 모씨(나이 42살, 신체가 남자처럼 건장하고 완력이 남자 대여섯 명을 당해낼 만하여 고대수라고 불리며 왕비의 총애를 받아 가까이 모시는데 10년 전부터 우리 당에 들어와 때때로 비밀을 통보해온 자다)가 화약(2년 전 내가 일본 유람할 때 탁정식을 시켜 서양 사람에게 부탁해서 구입한 것이다)을 대통에 조금씩 넣어 가지고 있다가 외간에서 불이 일어남을 신호 삼아 통명전(나라에 상례가 있을 때 사용하던 곳이다. 항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키지 않았다)에서 불을 붙이기로 한다.(김옥균, <갑신일록>)
그러니까 김옥균이 일본에서 가져온 화약을 간직했다가 약조한 시각에 화약은 터뜨린 것이다. 그는 약속대로 대통에 '폭렬약' 즉 화약을 넣어 가지고 통명전에 숨어들어 적시에 터뜨렸다. 아무리 궁중 출입이 자유로운 궁녀라 해도 왕의 침전이 가까운 통명전에 숨어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시절에 화약은 아무나 쉽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으로 처형된 사람이 40명이었다. 그 중 여자는 유일하게 궁녀 이우석(李禹石)이 포함되었다. 고대수의 본명이 이우석이 아닐까 싶다. 다시 조하서 상궁의 전언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고대수는 대역죄인 이라 씌어진 명패를 목에 걸고 서울 육모전 거리(지금의 종로)를 지나 형장으로 끌려갔다. 성난 군중들이 달려들어 쥐어뜯고 할퀴어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수구문을 지날 때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앞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마폭이 떨어져나갔으며, 왕십리 청무밭쯤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이 빗발치듯 돌멩이를 던지자 머리가 깨지고 살이 찢겨 선혈이 낭자하더니 마침내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비변사등록>, 고종 22년(1885) 12월 22일조에는 포도청이 '죄인 이우석'을 체포하여 왕에게 처분을 구하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같은 날짜의 <고종실록>에도 역시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은 이우석의 처형을 윤허한다.
그렇다면 고대수와 이우석은 같은 인물이 아닐까?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사상적으로나 정변 실행과정에서나 여러 가지 미숙함과 문제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었고, 이에 동참한 궁녀 고대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혁가였다.(박석분ㆍ박은봉,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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