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찬송가의 여왕을 만나보세요
어제는 입춘이란 절기를 한껏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포근한 주일을 보내셨나요? 벌써 2월 둘째 주를 맞습니다. 1월을 순식간에 보내고 2월인가 싶더니 이번 주 설을 보내면 어느덧 2월 중순이 됩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세월의 속도를 절감하니 찬송가 가사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세월이 살 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3절 가사입니다. 빠른 세월은 우리의 쾌락과 즐거움을 끝낼 것이고 언젠가 사망의 그늘이 우리를 두를 텐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 앞에 오라는 내용입니다.
기독교는 이 예수를 통해 우리의 죽음과 고통, 절망의 문제를 해결 받는 구원에 이르고 구원 얻은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다고 말합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서는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증거한 무디 선생님과 삶, 그리고 태어난 지 6주 만에 시각장애인이 됐지만 비장애인은 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 신앙 세계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작사한 ‘찬송가의 여왕’ 패니 크로스비 여사 이야기를 만납니다. 크로스비 여사의 대표 찬송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처럼 우리도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임을 고백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당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였습니다. 도요토미는 자신의 천하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종교든지 최대한 이용하려 했습니다. 기독교 역시 이용 가치가 있는 동안은 보호하고 장려했습니다. 전임자인 오다 노부나가 시절인 1580년경에는 약 35만명의 기리시탄이 있었고, 히데요시 대에는 더욱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히데요시가 1586년 일본 교회 최고 지도자인 코엘류 준관구장을 오사카성에서 만났을 때 히데요시는 규슈 정복과 중국 침공 계획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조선과 중국에 출병할 즈음 중무장한 두 척의 대형 포르투갈 함선을 준비해 주도록 선교사들에게 요청했고, 정복 후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자유와 일본에서 선교의 자유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히데요시의 의향에 코엘류 일행은 도움을 주겠다고 비위를 맞춥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의도는 대륙을 침략할 때 기리시탄 다이묘를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1587년 6월 규슈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기리시탄 다이묘의 중심이었던 다카야마 우콘에게 기독교를 버리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우콘이 거절하자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했습니다. 일본 체류 모든 선교사는 20일 이내에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됐으며 교토 오사카 나가사키의 교회당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1596년 산 펠리페 호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닐라에서 멕시코로 향하던 스페인 무역선 산 펠리페 호가 태풍을 만나 도사(현재의 시코쿠 고치현) 해안에 표류했는데 이때 일본 측이 선적된 짐과 배를 몰수했습니다. 이에 성난 선원들이 세계 지도를 펼치고 스페인의 강대함을 보이며 일본을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파견은 일본 침략을 위한 준비이며 스페인이 군대를 파견해 일본을 정복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프란치스코회 탄압을 단행합니다. 그 결과가 26명의 순교입니다. 일본 기리스탄의 순교는 1873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 D L 무디는 9남매 중 여섯째로 출생했습니다. 4살 때 부친을 여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동네 유니테리언 교회에 출석했고 이 시기 최초로 신앙적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이때 무디는 자신이 출석하는 주일학교에 많은 친구를 전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으로 무디는 초등학교를 끝으로 더 이상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1854년 보스턴에서 구두방을 운영하는 외삼촌 밑에서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이후 시카고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구두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도시 주민들에게 종교생활이 부족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출석하던 회중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했고 주일학교 교사, 주일학교 교장으로 어린이 선교 사역에 힘썼습니다. 이후 독립교회를 세웠고 YMCA(기독청년회) 사역에 개입해 복음전도자로서의 열정을 보였습니다. 1861년 구두 판매업을 중단, 본격적인 도시 선교사로서 헌신합니다.
1867년 아내의 건강 문제로 영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돼 그곳에서 전도 활동을 벌였고 탁월성을 인정받아 1872년 YMCA 일로 다시 영국에 갔다가 설교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는 고무적이었고 무디는 이를 통해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는 영국 사역 시절 조지 윌리엄스, 찰스 H 스펄전, 조지 뮬러 등 신앙 동지를 만나 그들로부터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무디는 이듬해 찬양 사역자 아이라 데이비드 생키와 함께 영국을 방문해 연합 복음 집회를 열었습니다.
무디의 설교는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열정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그와 동역했던 생키의 영혼을 울리는 찬송은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어 이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1873년 이후 189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영국을 더 방문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1892년 성지순례를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하던 중 심장에 이상을 느낀 무디는 대중 집회보다는 예배를 통해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보살피며 조용하게 사역하다 1899년 11월 16일 미주리주 캔자스시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중 쓰러져 별세했습니다.
무디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컬컬한 목소리와 많은 문법, 철자, 발음 등이 틀리고 설교에도 결함이 많았지만 그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처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또 충분치 못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담대하게 증거하는 탁월한 은사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촉구하는 그의 메시지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칼뱅주의 신조를 근간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예화를 적절하게 잘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예화를 생동감 있게 잘 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무디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청중들로부터 찬사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건전하며 신령하게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때문에 위대한 부흥회 강사,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디는 그의 이름을 D L 무디라고 서명하고 목사 안수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단지 평범하게 무디씨(Mr. Moody) 혹은 부흥사로 불러주기를 원했습니다.
1886년 무디가 선교와 선교사 훈련을 위해 세운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은 지금도 전액 무료로 운영되고 있으며, 전도자와 성경 교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 성결교회 선교사로 온 동양선교회 창시자 카우만과 킬보른 역시 이 학원 출신입니다.
30세가 되던 1850년 11월 크로스비는 어느 부흥집회에서 온 회중이 아이작 왓츠의 찬송가 ‘웬 말인가 날 위하여’를 부를 때 함께 부르다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구절에서 큰 감동을 받고 회심, 평생 왓츠와 같은 찬송가 작사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1858년 시각장애인 음악가 알렉산더 반 알스타인과 결혼, 시인이자 복음성가 가수, 간증 사역자로 활동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육신의 눈을 멀게 하신 대신에, 나의 영의 눈을 열어주셨다. 내가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찬양을 위해 살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찬양시를 쓰게 하셨음을 나는 믿는다. 만약 내가 육신의 눈을 떠서 세상 것으로 장애를 받았더라면 내 어찌 그토록 많은 찬송시를 쓸 수 있었으랴…인생이 그다지 길지 않기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노래하게 하련다.”
크로스비는 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윌슨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현대 집회 찬송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미국 찬송가에는 그녀의 저작이 수록돼 있습니다. 아이작 왓츠와 찰스 웨슬리를 제외하고 크로스비는 20세기 작가 중 가장 많이 찬송가를 쓴 작사가입니다. 무디와 생키 복음주의 캠페인의 성공이 크로스비의 찬송가 때문이라고 여겼을 정도입니다.
크로스비는 1000개 이상의 일반적인 시도 썼으며 4권의 시집과 2권의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의 작곡가로서 최초로 세속적인 칸타타인 ‘꽃의 여왕’을 비롯해 애국적 노래, 성경적인 주제를 사용한 다섯 개의 칸타타를 공동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선교에도 전념했고 대중 연설로도 유명했습니다.
크로스비의 가장 잘 알려진 찬송가는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장)을 비롯해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31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0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176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240장), ‘너희 죄 흉악하나’(255장),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나의 생명 되신 주’(380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384장), ‘오 놀라운 구세주’(391장), ‘주 예수 넓은 품에’(417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35장), ‘십자가로 가까이’(439장), ‘주와 같이 되기를’(454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498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531장), ‘주께로 한 걸음씩’(532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540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608장), ‘그 큰 일을 행하신’(615장) 등 21곡의 작사곡이 있습니다.
[참고 서적]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나카무라 사토시 지음, 박창수 옮김, 홍성사
<알기 쉽게 쓴 21세기 찬송가 해설> 오소운 목사 지음, 성서원
<현대교회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엄성옥 옮김, 은성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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