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장애인, 개성 강한 비장애인…함께 살며 반짝이는 이야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사랑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헌신하다 헌신짝이 되는 사람도 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1월 24일 개봉)은 사랑의 이런 권력관계를 장애인·비장애인 여성과 한 남자의 기발한 삼각관계로 풀어냈다. 눈치 보는 성격과 외모 콤플렉스 탓에 만년 ‘왕따’인 경리직원 영미(이유영)가 아내 때문에 공금을 횡령한 직장 동료 도영(노재원)을 짝사랑하다 오히려 도영의 아내 유진(임선우)과 얽히는 여정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1999년 12월 31일, 용기를 짜내 도영에게 고백한 영미는 다음날 도영의 횡령을 방조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간다. 도영이 빼돌린 돈을 영미가 사비로 메꿔왔다는 게 들통난 것이다. 이듬해 출소한 영미를 마중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유진이다. 명품을 휘감은 유진은 턱 아래 온몸이 마비된 장애인이다. 서로를 ‘남편과 바람 난 불륜녀’와 ‘사치로 남편을 파산시킨 악처’로 오해한 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흑백이던 영화 화면이 이때부터 컬러로 바뀐다.
데뷔작 ‘69세’(2020)에서 젊은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당한 여성 노인의 구명 과정을 다뤄 부산국제영화제 KNN관객상, 서울국제여성영화제박남옥상 등을 받은 임선애(47) 감독이 12년 전인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으로 쓴 시나리오를 다시 꺼냈다. 개봉 다음 날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임 감독은 “극 중 유진처럼 20대 초반에 갑자기 근육병이 찾아온 막내 이모를 보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며 “유진을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관을 가진 장애인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12년 전 제목은 ‘이쁜 여자’로, 개성 있는 외모의 비장애인과 연예인 버금가는 외모의 장애인, 두 여성이 서로 질투하는 얘기였다. 임 감독은 “다시 보니 낡은 이야기로 느껴졌다”며 “영미도 나름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지만, 결핍이 있다고 불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남자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되면서 남들이 보지 못한 반짝거림을 발견하는 이야기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갈 곳 없는 영미는 까칠한 유진을 잠시 돌보며 더부살이한다. 둘은 감추고 싶은 서로의 밑바닥을 보며 점차 솔직해진다. 자존심 강한 유진은 남의 도움이 없으면 옷에 소변을 흘린다. 영미는 사촌오빠가 내팽개친 치매 큰어머니를 모셨는데, 수감된 사이 사촌오빠가 일방적으로 전 재산인 집을 처분했다. 게다가 사촌오빠의 방화로 영미는 온몸에 심한 화상 흉터까지 있다. 사정을 알게 된 유진은 그 흉터를 두고 “맨드라미꽃을 닮았다”고 한다. 영미 역시 장애에도 늘 당당한 유진을 점점 닮아간다.
흑백이던 영미의 세계가 유진으로 인해 컬러풀해질까. 임 감독은 “원래 컬러풀했던 영미의 세계가 타인에 의해, 또 스스로에 의해 발견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데뷔작부터 꾸준히 여성의 시선과 삶의 경험을 스크린에 담아온 임 감독은 “아픔을 겪은 사람의 삶이 결국 재생된다는 주제에 매번 도달한다”며 “기어코 다시 살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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