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총! 정해진 선을 넘는 당찬 여자들의 이야기

2024. 2.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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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Fearless Female, 유쾌하고 용감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1편의 픽션과 1편의 그림이 도착했다.
「 깡 총 」
경애는 못마땅했다. 25만원이나 줬는데, 이토록 어설픈 입주 청소의 상태를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물론 지은 지 20년도 넘은 집이라 어떻게 해도 깔끔해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몰딩과 주방 가구가 모두 진한 밤색이었다. 내가 집주인이면 싹 리모델링 한번 했을 텐데. 경애도 요즘 유행이라는 새하얀 인테리어의 집에서 살고 싶었다. 또래 친구들은 모두 정신병원 같다고, 그런 집은 줘도 안 간다고 했지만 뭘 모르는 소리다. 요즘 그런 하얀 집에 산다는 건 돈이 있다는 거다.

없는 것들이 "저 포도는 시다"고 자꾸 아우성쳐봤자, 그저 딱해질 뿐이다. “할머니, 청소 더 하고 싶은 데 있어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작은 몸집의 남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짙은 이목구비와 눈썹, 몰딩의 밤색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구릿빛인 피부가 그의 출신지를 짐작하게 했다. 경애는 기다렸다는 듯 남자와 그의 동남아 출신 일꾼들을 데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다시 청소시켰다. 범아시아권에서 그럭저럭 잘 먹히는 경로사상의 힘으로, 그들은 원래 약속했던 시간보다 한참을 더 일한 뒤에 떠났다. 경애는 이득을 본 기분에 속으로 히히 웃었다.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이라니, 말년에 출세했네. 뿌듯한 기분으로 안방 화장실의 청소 상태를 꼼꼼하게 살핀 뒤, 경애는 하얀 변기 수조의 뚜껑을 바라봤다. 물 절약해야지. 변기로 흘러 내려가는 물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경애는 오래전부터 벽돌을, 최근에는 물을 가득 채운 페트병을 꼭 넣어두곤 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은 4인 가족이었다. 이 신도시에서는 찍어 내기라도 한 듯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조합이다. 당연히 변기 물을 아끼는 생활 상식 정도는 있는 가족으로 보였다. 경애는 끙차, 소리를 내며 도자기로 된 흰 뚜껑을 들어 올렸다. 이내 경애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새삼 그 집 부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뭐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더라…? 경애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찔러 넣어 수조 속에서 건져낸 것은 지퍼백에 들어 있는 까만 권총이었다.

다음 날, 경애는 교회로 향했다. 알고 보니 작년에 ‘이야기 할머니’로 자주 방문했던 어린이집이 바로 요 근처였다. 그 ‘물건’을 발견한 순간, 경애는 특유의 눈썰미와 기억력을 총동원했다. 그 집에 걸려 있던 커다란 교회 달력, ‘항상 기뻐하라’는 나무 팻말, 부동산 중개사가 섞어 쓰던 ‘목사님’이라는 호칭. 틀림없다. 경애는 생활 한복 브랜드에서 산 아끼는 누비 가방에 손을 넣어, 몇 겹으로 꽁꽁 싼 보따리를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개척 교회’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작고 아담한 교회였다. 얼마 전 봤던 드라마 속 사이비 마약왕 목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바깥양반 착하게 생겼던데. 그렇다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평일 낮의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용건을 가지고서 사람이 많은 시간에 찾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평한 마음으로 경애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교회엔 왜 다들 이런 의자를 갖다 놓나 몰라. 무슨 법으로라도 정해져 있나?

그때 삐거덕, 문이 열렸다. 경애가 돌아보자, 상대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교복을 입은, 그 집의 중학생 딸이었다. 초면이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거실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속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갸름한 얼굴이 인상 깊었으니까. 실물이 더 낫네. 10대 청소년답게 낯을 가리면서 돌아 나가려는 아이를, 경애가 불러 세웠다.

“얘!” 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너희 아버지, 여기 목사님이지?” “그런데요.”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경애는 언제나 잘 먹히는 온화한 할머니의 얼굴로 말했다. “나, 너희가 이사 간 집에 새로 들어온 할머니야. 목사님하고 할 얘기가 좀 있어서 그런데, 연락 좀 해줄 수 있….” 다음 순간, 경애는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약 30초 뒤. 경애는 차가운 돌바닥에 얼굴을 댄 채로 눈을 떴다.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니 그 중학생 딸이 쪼그리고 앉아 경애의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아이가 메고 있는 백팩에는 작고 단단한 쇠공이, 귀여운 열쇠고리인 척 발랄하게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 뒤통수나 내리치려고 저런 걸 달고 다니냐! 미친 목사가 나오는 드라마인 줄 알았더니 정신 나간 불량 청소년이 주인공이었어? 경애는 육식동물처럼 가만히 누워서 때를 노렸다.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꽁꽁 싸놓은 권총 보따리에 손이 닿은 듯했다. 그 순간 경애는 번개처럼 일어나, 헤드록을 걸듯 아이의 목을 감싸며 졸랐다. 아이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괴력을 발휘하며 경애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곧장 통로를 달려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얘! 얘야!!!” 권총은 이미 아이의 교복 주머니에 삐죽 꽂혀 있었다. 급한 마음에 경애도 몇 걸음 따라 옮겼지만, 이내 멈춰서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십대 애를 쫓아 뛸 체력은 못 된다. 상황을 머릿속으로 차분히 정리하면서, 경애는 다시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때 삐거덕, 문이 열렸다. 경애가 매서운 눈빛으로 돌아보자,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가 천진하게 물었다. “어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경애는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황급히 온화한 할머니의 얼굴을 만들고 웃어 보였다. 다음 날, 경애는 그 아이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교문 앞에 서 있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또래들이 수십, 수백 명이었지만 놓칠 리가 없다. 놓칠 수가 없다는 자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혼자서 하교하는 아이가 보였다. 경애는 최대한 몸을 숨기고 아이의 뒤를 따랐다. 뜻밖에 아이는 시외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이사를 멀리 갔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히터를 튼 버스의 훈훈한 공기와 불규칙적인 흔들림에 나른해지려는 찰나, 정신을 차려보니 옆자리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왜 쫓아오세요?”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부모님은 아시니?” “무슨 상관인데요.”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 얘기 들어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아니면 바로 경찰 부른다.” “맘대로 하세요.” “이게 진짜.” 경애가 보란 듯 휴대폰을 꺼내자, 아이가 그제야 경애의 팔을 붙잡았다. “아, 하지 마세요. 저, 사실 학폭 피해자예요. 괴롭힌 애들한테 복수하려고 구한 거예요.” “총으로 뭘 어쩌려고 그러니?” “걱정 마세요, 겁만 줄 거예요. 아! 지금 내려요.”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가. 경애는 영문도 모르고 아이를 따라 내렸고, 곧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건물에 들어섰다. “그냥, 망만 좀 봐주세요.” 더 이상 뭐라 설명하지도 않고, 딩동- 아이가 벨을 울렸다.

경애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더니,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 큰 남자가 나왔다. 도저히 중학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애는 도대체 뭐 하는 애야? 그때 아이가 윗옷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는 척하더니 남자의 가슴에 집게손가락을 겨눴다. 경애는 놀라지도 않고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지수 언니 대신 복수하러 왔어요.” 남자가 솥뚜껑 같은 손을 휘둘러 아이를 내리쳤다. “미친년이… 넌 오늘 내가 죽인다.” 남자가 아이를 질질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경애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자신의 누비 가방 속을 들여다보았다. 왜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잠시 뒤, 경애는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집요하게 누르고 또 누르자 곧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세요?” “지난주에, 아랫집으로 이사 온 할머닌데요.”경애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덧붙였다.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사실 우리 딸이 경찰….” 곧 씩씩 숨을 몰아쉬는 거대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경애는 문틈으로 집 안을 살폈다. 아이가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무 일 없으니까 참견 마요.” 남자가 툭 내뱉으며 문을 닫으려는 순간, 경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누비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남자의 허벅지를 향해 쏘았다. 퓻. 김빠지는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울렸다. 그래, 중학생 여자애가 마련한 총인데 당연히 소음기쯤은 장착되어 있어야지. 아이는 익숙한 듯 남자의 양팔과 다리를 밧줄로 묶었다. 경애는 그 옆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할머니가 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바로 알아봤죠.” “그거 말고.” “저 사업하거든요. 복수 대행이랄까? 이 아저씨, 여자 친구 가둬놓고 때리고 머리 밀고 밥 굶기고 지지고 별짓 다 한 인간이에요. 쓰레기야 쓰레기.” “중학생 여자애가 혼자 어떻게?” “바로 그 생각의 빈틈을 노리는 거죠. 그리고 저 초딩 때부터 사격 배웠어요.” “이러려고 배웠니?” “네, 이러려고. 저 돈 많이 벌어야 돼요. 한국에서 안 살 거예요.” “하….” 경애는 할 말을 잃었다. “저랑 같이 해요. 어차피 이제 공범이잖아. 할머니도 돈 많이 벌게 해줄게요. 아무것도 안 물어볼 테니까. 개꿀이죠?”

이 당돌한 것 좀 보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다 죽은 줄 알았던 심장이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와 여중생이라. 그렇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확실히 어디서건 절대 의심받지 않을 콤비다. “넌, 이름이 뭐야?”밧줄을 꽉 묶느라 흐른 땀을 닦으며, 아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비밀이에요. 그냥, 토끼라고 불러요. 제가 토끼띠라서.” 재밌네. 나도 토끼띠인데. 역사상 가장 사납고 말썽스러운 토끼 한 쌍이겠군. 경애는 속으로 생각하며 히히 웃었다.

Illustrator_성키

정서적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당근 플레이리스트 루프 애니메이션, 국립극장 미디어글라스 전시, 한강 노들섬 클래식 키 비주얼 작업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Writer_민지형

소설가, 드라마 작가.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쓴다. 장편소설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나의 완벽한 남자친구와 그의 연인〉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TV 드라마 〈레버리지:사기조작단〉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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