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전원일기 재방송 보는데 내가 감히… 국민엄마 낯설어”
“나도 너만치 아프고 너만치 나도 보고싶다게. 나도 부미자 보고 싶다고! 나도 친구 잃었다게. 너만 아픈 거 아니라게!”
함께 바다에 들어갔다가 친구를 잃은 고미자의 감정이, 20년 묵은 슬픔이 터져 나왔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고미자는 주인공 삼달(신혜선)과 용필(지창욱) 못지않게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두 미자가 함께 쌓아온 시간과 추억이 드라마 속에서 압축적이지만 충분히 그려진 덕에, 고미자의 울음이 터져 나올 땐 큰 울림이 있었다. ‘웰컴투 삼달리’엔 삼달의 엄마가 아닌, 해녀회장이자 친구를 잃은 슬픔을 간직한 해녀 고미자의 인생도 담겨 있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소속사에서 만난 김미경은 “너무 오랫동안 엄마를 해왔어서 최근에 맡은 역할들이 더 특별하다거나 하진 않았다”면서도 “‘웰컴투 삼달리’나 ‘이재, 곧 죽습니다’는 엄마의 서사가 있잖나. 그래서 연기를 할 때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어서 재밌고 좋았다”고 말했다.
60번 이상 작품 속에서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했는데, 기억에 남는 건 엄마의 이야기가 있었던 작품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부부’나 ‘하이바이, 마마!’, ‘웰컴투 삼달리’가 그의 뇌리에 박혀있다.
1985년 연극 ‘한씨연대기’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김미경은 점차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그러다 41살의 나이로 처음 엄마 역할을 맡았던 드라마 ‘햇빛 쏟아지다’(2004) 이후 엄마 역할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당시 아들 역은 배우 류승범이 맡았고, 20대 아들과 50대 엄마를 연기했다. 김미경은 그때를 회상하며 “처음 그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감독님한테 너무 심하지 않냐고 했더니 변장하면 된다더라. 그래서 ‘그런가?’ 생각하고 배역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엄마가 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작품에서 맡은 엄마만 60번이 넘었고, 작품 속 자식만 70명 이상이다.
많은 작품에서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일 뿐 자신만의 서사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 역할을 주로 맡는 게 아쉬울 법도 하지만, 김미경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일이 들어왔을 때 제가 정한 기준에 반하지만 않는다면 다 한다. 연기자면 연기를 해야지”라고 말했다. 그래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모적인 캐릭터의 엄마보다는 이야기 안에서 엄마가 힘을 보탤 수 있는 역할이 좋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김미경은 김혜자, 고두심, 김해숙의 뒤를 이어 ‘국민 엄마’ 타이틀을 달았다. 단순히 엄마 역할을 많이 해서는 아니다. 어떨 땐 따뜻하게, 어떨 땐 시니컬하게 진짜 엄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자살한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일어나 아들, 엄마 왔어. 집에 가자” 하며 오열하는 장면에서 모든 시청자가 눈물을 훔친 건 ‘이 마음의 깊이가 여기가 끝일까’ 고민하며 연기한 김미경 덕이다. 그가 표현해낸 엄마의 모습은 전 세계에도 통했다. 드라마를 본 해외 팬들은 그의 SNS에 찾아와 ‘umma’ ‘eoma’처럼 엄마를 발음대로 적은 단어를 남기고 간다.
그럼에도 김미경은 아직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가 낯설다고 했다. 그는 “가끔 ‘전원일기’ 재방송을 보는데 김혜자 선생님을 보면 정말 경이롭다”며 “(‘국민 엄마’란 말을 들으면) ‘내가 무슨 감히’ 이런 마음이 든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자신이 연기해내는 엄마의 모습이 올해 96세가 되신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김미경은 “제가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저희 엄마는 단 한 번도 네 자매가 아버지의 부재로 슬프거나 외롭지 않게 하셨다”며 “엄청 강한 분이지만 무섭지 않았고, 누구 하나 소홀함 없이 정말 따뜻하게 품어 키우셨다”고 말했다. 실제 엄마로서의 김미경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는 “개그맨 같은 엄마”라며 “저는 무서운 엄마는 싫은데 딸이 저더러 개그맨 같아서 좋다고 하더라. 성공했다고 생각했다”고 뿌듯해했다.
김미경의 대답에서 엿볼 수 있듯, 드라마 속에선 한없이 따뜻하고 인자한 엄마지만 김미경의 ‘본캐’는 역동적인 활동을 즐기는 걸크러시 언니에 가깝다. 그는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드럼도 친다. ‘이재, 곧 죽습니다’를 찍으면서 본 스카이다이빙이 기억에 남아 자격증을 알아봤을 정도다. 물론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고 해서 자격증 따기는 포기했다. 어릴 때 운동선수를 꿈꿨다는 그는 “엄마가 다칠까 봐 운동을 결사반대하셨다. 그때는 제가 돈이 없어서 못 했지만, 경제활동을 하면서 어릴 때 못한 걸 하나하나 다 하는 중”이라며 “하고 싶었던 건 다 해보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 나이랑 상관없이 다 해본다”고 말했다. 그 덕에 ‘웰컴투 삼달리’에서 해녀를 연기하며 바다에 들어가는 게 그는 즐거웠다고 한다.
취미를 향한 열정만큼이나 강렬했던 건 연기를 향한 그의 열정이었다. 작년에 그가 출연한 드라마만 ‘대행사’ ‘닥터 차정숙’ ‘사랑한다고 말해줘’ ‘웰컴투 삼달리’에 ‘이재, 곧 죽습니다’까지 5편에 달한다. 올 초부터 방영을 시작한 ‘밤에 피는 꽃’에도 출연 중이다. 김미경은 “저는 일 욕심이 굉장히 많고 일 중독”이라며 “작년엔 ‘내가 어쩌자고 이걸 다 했지?’ 할 정도로 바빴다. 근데 저는 거기에 특화된 몸 같다.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 1인 13역이어서 10초, 15초 만에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는 걸 많이 해서 그런지 몸에 익었다. 상반된 캐릭터의 인물을 동시에 하면서 적당한 긴장을 이어가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 말했다.
그에게 연기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어릴 때 ‘한씨연대기’라는 작품의 총리허설을 봤었는데 우리 한이 배어있는 이야기더라. 나도 저런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입단했는데 처음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었다”며 “쉼 없이 일하다 보니 연기를 통해 치유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자유로움도 그렇고, 쌓인 걸 다 비워내야 새 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작업을 끝없이 하다 보니 날 비워내면서 치유가 돼서 좋더라. 내 일이 행복하다”고 답했다.
“연극을 하면서 연기를 해서 먹고살 수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친구들과 얘길했어요. 돈을 벌고 싶다는 것보다는, 오랫동안 연기를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너무 감사히도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는데, 죽기 전까지 연기를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이게 내 진심인가, 이게 최선인가’ 질문하고 싸우는 걸 계속할 것 같아요.”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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