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뺨 때린 친일 교사... 결국 총리가 되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2. 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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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면

[김종성 기자]

 장면 전 국무총리
ⓒ 위키미디어 공용
 
1963년 대통령선거 때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남조선노동당 경력과 더불어 친일 이력이 크게 회자됐다.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가 남로당원이었음을 부각시켰고, 국민의당 안호상 최고위원은 그해 9월 25일 교동국민학교 시국강연회에서 박정희의 일본군 경력을 부각시켰다. 9월 27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 등에서 확인되듯이, 국민의당 허정 후보는 박정희가 한일회담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비슷한 일이 3년 전인 1960년 4·19혁명 직전의 3·15 대선 때도 '잠깐' 있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병옥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복부 수술을 받고 열흘 뒤인 그해 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대선에서 민주당의 실질적 대표주자는 부통령 후보인 장면 부통령이었다.

제1공화국 때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각기 다른 정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장면은 1956년 대선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자유당의 이기붕을 꺾고 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선거에서는 자유당 이승만이 1위, 무소속 조봉암이 2위를 기록했다. 이때 부통령이 된 장면이 4년 뒤에도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것이다.

대선 후보 조병옥이 급사한 지 보름 뒤인 1960년 3·1절 새벽, 서울 시내 전봇대와 건물 곳곳에 거의 1m 간격으로 대자보가 부착됐다.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3월 2일자 <동아일보> '전국에 괴상한 벽보'는 "거의 사태가 날 정도로 나붙인 이 벽보"라고 보도했다. 너무나 많이 붙었기에 '무슨 사태가 났나' 하는 느낌을 줬던 모양이다.

구국철혈동지회라는 단체가 붙인 이 벽보에는 '일제시대의 장면(玉岡勉) 박사의 모습'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창씨명이 다마오까 쓰토무(玉岡勉)인 장면이 일제 국민복을 입은 사진, 장면이 일본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렸다. 벽보에 적힌 글귀는 '음흉한 친일도배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민족정기가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벽보가 부착됐으니, 그 새벽에 자유당 정권이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국민들이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과 장기 독재와 정치적 무능에 염증을 느끼지 않았다면, 1963년 대선 때처럼 이때도 친일 이슈가 부상했을지 모른다. 국민들은 벽보를 보고 '무슨 사태 났나' 하고 놀라기만 했을 뿐, 내용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위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시민들은 거의 사태가 날 정도로 나붙인 이 벽보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 그대로 지나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그러한 사진을 선거기인 이제 와서 내붙인다는 것은 야당 후보자의 인신을 공격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여 오히려 의아심을 느끼는 것도 같다."

그날 장면 후보는 유세 때문에 부산에 있었다. 위 날짜 <동아일보>의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그도 그날 아침에 벽보를 목격했다. 이에 대해 그는 말을 아꼈다. 논평을 부탁하는 기자에게 "일제시대에는 학교 직원으로서 소위 국민복이란 것을 안 입을 도리가 없었다"라며 "학교를 폐쇄당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만 말했다. 친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장면의 친일, 천주교의 친일

대한제국 3년 차인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출생한 장면은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와 서울대 농대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교를 졸업했다. 그런 뒤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맨해튼가톨릭대학에 들어가 3·1운동 6년 뒤인 1925년에 졸업장을 받고 귀국했다. 일제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가 육성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뒤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활동한 그는 1931년에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37세 때인 1936년부터 교장으로 근무했다. 지금의 서울 대학로 북쪽 끝부분에 있는 동성고등학교가 이 학교를 계승했다.

그가 친일파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얼마 뒤였다. 일왕을 신으로 숭배하는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일이 중일전쟁 이듬해부터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면 편은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천주교 측 대표)으로 참여"했다고 말한다.

그 뒤 그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비상시국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비상시 생활개선 순회강연반 연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 겸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의 친일 전향은 개인적 차원이기보다는 교단 차원에 좀 더 가까웠다. 하지만 오로지 그 자격만으로 수행된 것은 아니다. 1940년에 동성상업학교 교장 명의로 동대문경찰서에 국방헌금을 내고 1943년에 이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항공비 구입비 130여 원을 동대문 경찰서에 낸 것은 결을 달리한다.

이 시기의 장면 교장에 관한 인상적인 회고담이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나왔다. 선종 2년 전에 발행된 2007년 6월 3일자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4] 나의 스승들'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1930년대 후반에 동성상업학교 윤리과목 수업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수신과목 시험시간에 일제 황국신민화정책에 반기를 드는 답안지를 내자, 장 박사님은 나를 불러 야단을 치시다 뺨을 때리셨다. 학교를 폐교 위기로 몰아갈 위험천만한 내 행동을 꾸짖는 자리에서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으니 맞을 만도 했다. 장 박사님은 성품이 유순하고 학생들을 늘 사랑으로 대하셨던 분이다. 그분이 교직에 계시는 동안 유일하게 손찌검을 한 학생이 나 아닐까 싶다."

장면이 친일을 통해 얻은 금전적 이익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친일 관변단체의 실무책임자인 간사를 지내고 순회강연을 다녔으니 어느 정도의 수익은 발생했겠지만, 학교에 근무하는 시간이 많았으니 친일로 고수익을 얻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한국 친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띤다.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 중앙집권성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이는 한국 천주교의 친일화를 저지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고 촉진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지도부의 입장이 전국 천주교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기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의 천주교 지도부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고서 제3-3권은 "조선 천주교회는 1932년부터 신사참배 불가에서 허용으로 바꾸고 1936년 4월에는 모든 주교들이 신사참배 허가로 의견을 모아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라며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신자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교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했다고 한 뒤 이런 상황에서 부각된 인물들을 이렇게 거명한다.

"조선 천주교회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할 당시 경성교구장 라리보 주교가 대표로, 장면이 담당자로 선출되었다."

프랑스인인 아드리앵장 라리보 주교(1883~1974)와 장면이 전쟁동원을 위한 관변단체에서 한국 천주교를 대변했다는 것은 라리보 주교보다는 평신도 지식인인 장면이 천주교의 친일을 이끌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친일행적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인물, 장면
 
 1948년 한국 대통령 바티칸 특사로 간 장면(왼쪽에서 다섯번 째)·장기영 일행.
ⓒ 위키미디어 공용
  
장면이 천주교 친일행각의 책임자로 부각된 이 시기에 한국 천주교의 친일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37년 7월 이후부터 1939년 5월까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친일행위의 건수는 아래와 같다.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 관련 미사 2만 9622회, 시국 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1938년에 서울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 노동자는 월 3원 내지 7원(식사는 회사가 제공)을 받았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위 금액 합계인 4978원 23전은 대략적으로 노동자 700명에서 1700명의 월급에 맞먹었다. 

성금도 성금이지만 그 기간에 벌어진 친일 행사의 횟수가 무척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39년 5월 이후의 친일까지 계산에 넣게 되면 천주교의 친일이 상당히 심각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장면의 친일은 한국 천주교의 친일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래서 장면 개인에 대한 비판을 떠나, 한국 천주교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장면의 친일은 정확히 알려질 필요가 있다.

한편, 친일 한 가지 만으로는 장면이라는 인물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장면이 친일파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친일에 버금가는 해악인 이승만 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은 점도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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