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고 싱싱한 채소 가득... 해 뜨면 사라지는 '반짝시장'
[임영열 기자]
▲ 설을 앞둔 광주 말바우 시장 풍경. 광주광역시 우산동 말바우 시장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시골 장터의 추억을 소환 할 수 있는 도심속 장터이다 |
ⓒ 임영열 |
또한 이런 감수성은 시간적 공간적 거리와도 비례한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그리움은 과거에 실재했던 '그 무엇'으로 결코 현실로 돌아올 수 없는 비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버린 '희미한 옛사랑'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확실하게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막연하게 무언가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감정을 심리학에서는 '노스탤지어(Nostalgia)'라고 한다. 17세기 '요하네스 호퍼(Johannes Hofer)'라는 심리학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와 '고통'을 뜻하는 '알고스(Algos)'를 합친 것으로 우리말로 '향수' 또는 '그리움'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 말바우시장 할머니 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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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꿈을 먹고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나 엄마와 함께 했던 장터의 추억은 마음 한편이 텅 빈 들판처럼 헛헛해지고 외로워진 '초로(初老)의 장년'들에게 따뜻한 위안의 손을 내밀어줄 것이다.
장터 모퉁이 허름한 목로식당 긴 나무의자에 앉아 먹었던 기가 막힌 국수맛. 물건 값을 흥정하느라 왁자하게 떠들던 사람들의 정겨운 얼굴. 뻥이요! 하는 외침과 함께 하얗게 터지며 코끝을 간지럽히던 구수한 뻥튀기 내음...
이제는 한갓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지만 그 시절 설을 맞은 시골 장터 풍경은 결코 지울 수 없는 흑백사진처럼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다. 수많은 이들의 삶과 사랑과 추억이 켜켜이 퇴적된 재래시장은 노스탤지어의 원천과도 같은 곳이다. 광주광역시에도 그런 '그리움의 수원지' 같은 곳이 몇 군데 있다.
▲ 광주광역시 우산동에 있는 광주 말바우 시장. 매월 2.4.7.9일 한 달에 12번 장이 선다. 시장의 트레이드마크인 말발자국 모양의 조형물이 걸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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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신경림 시인의 시 '파장' 중 일부).
정겨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시골 장터의 모습을 토속적으로 묘사한 신경림의 이 시는 추석이나 설이 다가오면 한 번쯤 읊조려 보게 되는 시편 중의 한 구절이다. 요즘 같은 날 이런저런 '못난 놈들' 만나 서로 얼굴 보며 막걸리 한 잔 들이켤 수 있는 곳 어디 없을까.
▲ 말바우 시장 주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집과 소줏값이 2,000원인 횟집들이 늘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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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을 앞둔 광주 말바우 시장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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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광주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탄 명마는 화살보다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말을 훈련시킬 때 생긴 말 발자국처럼 움푹 파인 바위가 시장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 시장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확장되기 전에 말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바위에 걸터앉아 말 타는 시늉을 하며 놀았다고 해서 '말바우'라 했다는 설이 전한다.
현재 말바우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건물 사이사이 골목과 도로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거리 노점형태의 장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일 시장으로는 500여 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는 호남 최대 규모로, 광주의 대표적 전통 시장으로 성장했다.
▲ 건물 사이사이 좁은 골목엔 인근에서 첫차를 타고 온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좌판을 벌이고 있다. 말바우 시장의 명물 ‘할머니 골목’이다 |
ⓒ 임영열 |
말바우 시장은 신선한 채소와 나물이 유명하다. 인근의 담양과 곡성, 순창, 구례에서 첫차를 타고 온 할머니들이 좁은 골목에 옹기종기 앉아 직접 기른 싱싱한 채소와 나물들을 판다. 서로 자리다툼 없이 오순도순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과 굵은 손마디에서 '늙은 어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시장 구석구석에 맛집들도 즐비하다. '할머니 골목' 근처 '팥죽 골목'에 가면 요즘처럼 추운 날에 속을 따뜻하게 덥혀줄 동지죽, 팥 칼국수 등 다양한 옛날식 팥죽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 말바우 시장 어물전. 조기, 병어, 동태.... |
ⓒ 임영열 |
이밖에도 농수축산물을 비롯해 떡, 반찬, 젓갈 등 식품과 건어물, 홍어, 생선, 김치와 의류, 신발, 모자, 이불, 각종 그릇, 화장품 등 공산품장이 펼쳐진다.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막차는 올까?... 밤 기차의 추억이 서린 '남광주 시장'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는 남광주역을 모델로 삼았다. 역은 폐쇄되었고 폐선 부지는 ‘푸른길 공원’으로 조성 됐다 |
ⓒ 광주관광공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 중 일부)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남광주역 근처 양림동에서 살았던 곽재구 시인이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널리 알려진 <사평역에서>라는 이 시는 남광주역을 실제 모델로 삼았다.
▲ 1930년대 남광주 역. 2000년 도심철도 이설로 인해 역은 폐쇄되었다 |
ⓒ 광주 역사민속 박물관 |
화순과 나주, 보성 등 인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남광주 시장으로 각종 농산물과 해산물을 팔러 오는 시골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주 이용고객이었으며 서울과 부산, 목포로 가는 밤 기차가 정차하는 환승역이었다.
2000년 경전선 도심철도 구간이 외곽으로 이설 됨에 따라 남광주역은 폐쇄되었고 결국 역사(驛舍)도 철거되었다.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가 흘러가는 역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광주 시장은 여전히 짭조름하고 비릿한 갯내음으로 가득하다.
▲ 남광주 시장. 남광주 역과 함께 개설됐다 |
ⓒ 임영열 |
▲ 남광주 시장 수산물 골목에 가면 각종 싱싱한 수산물들이 가득하다 |
ⓒ 임영열 |
남광주 시장은 1960년대 초부터 화순과 보성, 벌교 등지의 아낙네들이 손수 채취한 꼬막과 각종 채소와 나물 등을 열차에 싣고 와 대합실과 옛 학동 파출소사이 공터에 좌판을 벌이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 남광주 시장 수산물 골목에 가면 각종 싱싱한 수산물들이 가득하다 |
ⓒ 임영열 |
점포와 노점을 합하여 450여 개소가 영업을 하고 있으며 생선류, 채소류, 의류, 건어물, 국밥 등 골목별로 특성화되어 있다. 남광주시장에는 다른 시장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볼거리가 하나 있다. 이름하여 '해 뜨는 시장'이라 부르는 새벽 5시부터 아침 9시까지 시장 광장에서 열리는 새벽 '반짝 시장'이다.
▲ 남광주 ‘해 뜨는 시장’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서는 ‘새벽 반짝 시장’이다 |
ⓒ 해 뜨는 시장 상인회 |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산다는 아파트. 편리하지만 이웃 간 소통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이렇게 팍팍하고 점점 메말라가는 도시 생활에 지칠 때 찾아가는 장터는 고향 어머니 같은 푸근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요즘처럼 춥고, 마음 헛헛하고, 누군가 그립고, 고향 생각이 날 때는 남광주 시장으로 가라. 그곳 국밥 골목에 가면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얼큰한 국밥 한 그릇으로 '뜨끈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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